(중)|28년만에 가족 만난 「캐나다」 교포 이득애 여사 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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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어머니를 뵈옵던 날 가슴에 맺혔던 사연을 풀어헤치느라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고 이튿날 동이 트기 무섭게 아버님 산소를 찾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25년이 됐다는 것은 그 동안의 편지 연락으로 알고 있었다.

<주민들 몰려와 쌀밥 등 대접>
산소는 마을에서 10리 남짓 떨어져 있었는데 한시간 가량 걸어갔다. 우리 나라와 같은 모양의 봉분이었다. 싸 가지고 간 음식을 아버님 묘 앞에 펴놓고 꿇어앉아 한동안 일어설줄 몰랐다.
나는 물론 온 집안이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절은 하지 않고 기도만 했다. 목이 메어 기도 소리가 몇차례 이어졌다 끊어졌다 했다.
기도를 끝낸 뒤 얼싸안다시피 묘지를 어루만지노라니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어찌 주체하랴…. 무덤은 떼를 입히지 않아 잡초만 무성했다. 맨손으로 잡초를 솎아내려니까 한식 때만 한번 벌초할 뿐 손볼 여가가 없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산소 근처까지 바짝 밭을 일궈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아 밭갈이하는 사람에게 조심할 것을 일러주는게 좋겠다고 오빠·동생에게 당부했다.
마침 근처에 있던 6촌 보영 언니의 묘도 찾아보고 기도한 뒤 산에서 내려왔다.
오빠·동생·조카와 함께 10여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른 동네 앞을 지나치노라니 마을 어귀에 1백여명이 앞을 막고 있어 깜짝 놀랐다. 마을 사람이 모두 나와 있는 듯 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조카에게 물었더니 『고모가 멀리서 왔다는 소식 듣고 얼굴 좀 봐야겠다고 모두 나온 거랍니다』고 알려준다. 앞으로 다가가니 인절미랑 쌀밥이랑 손에 든 아낙네들이 내 앞에 모여들었다. 모쪼록 『우리 동네 들어와 자시고 가세요』라고 말하며 전한다. 모두가 하나같이 애틋한 표정이었다. 옛날 우리 나라 사람들의 순박한 표정은 내가 이곳을 떠난 뒤 28년 동안 맛보지 못했던 풍습을 보는 듯해 감회가 깊었다.

<농사 짓는 법 한국과 똑같아>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 집으로 가자고 졸라 내가 오히려 당황했다. 마침 모내기철이라 들에서 일하던 사람까지 손을 놓고 나와 권하는데는 이길 수 없어 잠깐 어울릴까고도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들이 그 동안 일을 안 하면 그만큼 수입이 줄어든다는데 생각이 이민 바쁘다고 부드러운 말씨로 거절했다.
그랬더니 할머니 한 분이 「당신 어머니하고 친구인데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다니 섭섭하우. 떡이라도 하나들고 가야지』라고 또 권한다. 고맙기도 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길에 선채 인절미 두어 조각을 맛보았다.
한때 내가 살았던 이 화전은 인구 10만명 정도인데 이중 우리 나라 사람이 1만여명 살고있어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인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이 집단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집단 농장이나 큰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동네에는 들이 많아 모심기 등 농사 짓는 방법이 한국과 똑 같았으며 인근의 중국 사람들은 모심는 방법을 한국식으로 바꾸었다고 들었다.
집단 농장에서 일하는 오빠의 월급은 그곳 돈 50원 (약 30「달러」정도·l「달러」=1·7원).
한달 집세가 4원 정도로 월급은 충분한 편이라는 것. 대체로 집값·음식값이 싼 편이라고 했다.
집단 농장은 상오 7시에 나가 하오 5시에 끝나는데 내가 방문했을 때는 5∼10명이 한 조로 모심기가 한창이었다.
일찍 끝나는 날은 다시 작업장에 나가 제초 작업 등 다른 일을 하는데 하루 결근하면 월급에서 2원을 제한다고 했다.

<아이스크림 장사까지 국영>
어머니가 사는 동네는 다소 시골이기 때문에 쌀·고기 등 식료품이 귀해 집에 손님이 온다든지 하면 멀리 떨어진 국영 가게에 나가 고기·사탕 등을 사다가 대접한다고 했다.
모든 것이 국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거리의 「아이스크림」 장사까지도 국영이라는 것이었다.
국영 식당인 인민 식당은 값이 싼 편이었다. 나는 공항이나 은행에서 「달러」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 「달러」가 크게 환영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행 전에는 그렇게도 초조하던 것이 당도해보니 생각보다 훨씬 덜했다.
동네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안내인은 「택시」를 태워 다녔는데 요금은 「호텔」서 청구서로 나왔다.
내가 어머님과 함께 있는 동안 저녁마다 이웃 사람들이 찾아와 잔칫집처럼 붐볐다. 다른 마을에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와 밤늦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네 사람들이 물어 보는 것은 「캐나다」·미국서 사는게 어떠냐, 교육 제도가 어떻더냐, 거기도 한국인이 많으냐, 외국에서도 한국 음식 그대로 먹고 있느냐는 등등 굉장히 궁금해 하길래 자세히 설명했다.
그들은 이북 소식을 잘 듣는데 한국에 관해서는 잘 모르는 듯 했다. 이북에는 가끔 1년에 몇 차례씩 다녀오기도 하는데 한번 가려면 그쪽의 동의서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룻저녁은 동네 노인 20여명을 초대해 저녁 대접을 했다. 노인들은 모두가 아버님 친구였다. 아버님 장례 치를 때 애 많이 쓰셨다고 고마운 인사를 전했다. 아버님 친구분들에게 드리려고 마련해 가지고 간 손목시계·조그만 「라디오」·옷감들을 선물로 드렸더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한 분이 『중국에 온 감상이 어떠냐?』고 묻길래 『나는 해방 전에 여기서 살아 봤기 때문에 중국을 잘 압니다. 공산주의 사상은 잘 알지는 못하고 별로 말하고 싶지도 않으나 지금 미국에 사는 내 입장이 중국서 사는 것보다는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고 대답했다.

<자유 없지만 담담히 사는 듯>
모두가 담담한 표정으로 내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옛날처럼 나가서 일만 하면 먹고산다. 몸이 아프지만 않으면 굶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분도 있었다.
내가 보기에 내가 포주 살 때는 거지나 마약 중독자가 많았으며 사치도 심하고 마작 등의 노름도 많았는데 지금은 그런게 다 없어진 것 같았다.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자유는 없어 보이지만 담담하게 사는 것 같았다. 바뀐 것은 이뿐이 아니었다. 결혼식도 아주 간소화되어 신부가 면사포 쓰는 일도 없고, 중국사람 특유의 거창한 장례식도 없어졌다.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내가 살던 마을의 교회 건물이었다. 지금도 나는 기독교 신자지만 옛날 우리 가족은 독실한 믿음의 집안이었다. 중공에 지금 기독교가 없어져 어머님·오빠·동생들도 예배를 보지 않고 있다. 한때 내가 다녔던 교회당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종탑의 십자가 표시라든가, 예배당 안의 예수님 성화는 없어진지 오래됐다고 들었다. 건물은 마을 사람들의 집회하는 공회당이나 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일반 주택 구조는 30년 전과 다름이 없었다. 방은 온돌방으로 집안으로 들어서면 가운데 현관 같은 것을 중심으로 나뉘어 있는데 「커튼」으로 방을 가리고 있었다. 한 집에 두서너 가구가 사는 경우도 있어 「커튼」만 들치면 부부 생활까지 다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었더니 주택난이 심해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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