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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중동에 박애 심는 이윤구 박사(3)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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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5년 이 박사는 세계기독교협의회(WCC) 산하 중동기독교협의회 「팔레스타인」난민사업부 서부「요르단」지구 책임자로 파견됐다. 「레바논」 「요르단」 「시리아」3개소의 특별사업부중의 하나였다.
67년의 6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의 뒤숭숭한 시기였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함께 「팔레스타인」지방에서 생활터전을 잃고 인접 「아랍」국가인 「시리아」「요르단」「레바논」으로 흘러 들어온 난민의 수는 2백 여만명. 몇 년이 지나도록 일자리는 물론 거처할 오두막 한 간 없이 살길을 찾아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비참한 사람이 많았다.

<「요르단」정부 설득에 고심>
이박사가 처음 「베이루트」에 와서 착수한 것이 이들을 정착시키는 문제였다. 처음부터 사업이 손에 잡힐 리는 없었다. 해결방법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2년이 후딱 지나갔다. 그동안 「팔레스타인」 난민 지도자들과 접촉할 기회도 많았는데 이들의 얼굴을 익혀두었던 게 뒷날 사업을 추진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2년여 동안 비교적 평온하게 일하던 이 박사는 67년 「이스라엘」의 「이집트」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6일 동안의 전격전 뒤부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비록 6일 동안의 전쟁이었지만 가뜩이나 하루하루의 생활에 쪼들리던 난민들에게는 커다란 타격이었다.
난민사업부는 새로 생겨난 피난민 정착계획에 손을 대게 되었다. WCC를 통해 세계 각 국서 모금된 예산으로 피난민촌 건설사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난민들의 유입을 꺼리는 「요르단」 「레바논」정부가 이들을 정착시키는 것을 달가와할리 없었다.
관계관리들과 협의·포섭을 했으나 이는 실무진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정치적인 결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장 「요르단」동부지방에 방황하는 난민들을 정착시켜야겠는데 허가를 얻는 게 문제였다.
다행히도 선행에는 길이 열리기 마련이다. 실무관리의 노력이었는지 필요성을 인식해선지 「요르단」정부의 각료회의에서 사업계획설명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이 박사는 각료들에게 사업계획을 말하기에 앞서 난민들의 입장을 이야기했다. 그의 차근차근하고 꾸밈없는 어조가 설득력을 발휘했다. 눈에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설명하며 이박사 자신도 눈물을 흘렸다. 각료들 피난민의 참상은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낀 사람이 아니고는 그 진상을 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피난민 5천 가구에 집을 마련해주는 일은 순조로웠다. 정착시키고 보니 「요르단」정부로서도 이들이 이리저리 방황하며 일으키던 사회문제도 줄어들어 이 박사에 대해 고맙게 생각했다. 「요르단」정부는 이 박사의 사업공적을 감사히 여겨 훈장을 주기로 결정했으나 자신은 할 일을 했을 뿐 그럴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겸손해하며 마다했다.
그가 피하는 통에 주인을 찾지 못하던 훈장은 나중 70년 그가 영국에서 수학하는 동안 「요르단」대사관을 통해 기어이 전달되고 말았다며 쑥스럽다는 듯 털어놓는다.

<「요르단」선 훈장까지 주기도>
이박사의 사업영역은 「요르단」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고 「시리아」에 들어가야겠는데 친「아랍」진영국가 사람들이 아니고는 입국이 허락되지 않았다.
적십자사 구호활동마저 거절하는 판이니 미국인이 주동이 된 기독교 봉사단체 직원, 게다가 친「이스라엘」로 인상지어져 있던 한국여권 소지자의 입국이란 턱도 없는 일이었다.
이 박사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팔레스타인」난민지도자들과 사귀어 두었던 것이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물론 「시리아」정부측과도 접촉하고 있는 유력한 친구의 도움으로 「시리아」입국허가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이는 서방인사에게는 최초로 허가된 「케이스」라는 데서도 파격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리아」에 입국한 이 박사는 「시리아」내무장관과 만날 기회도 마련되어 사업계획을 논의했다. 대뜸 말문을 연 것이 무얼 돕겠느냐는 물음이었다. 필요한 도움이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당장 필요한게 집 잃은 사람들이 잠자리에 깔고 잘 「매트리스」라는 대답이었다.
이 박사는 이 「매트리스」를 마련해주는데 자기 나름의 독특한 방법을 제의했다.
서방계통의 단체라면 적십자마저 미·「이스라엘」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이 박사 역시 미심쩍은 기분이 가시지 않았을 터이므로 일석이조의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난민지도자와의 친교가 도움>
이 박사는 「매트리스」를 외국에서 구입하지 말고 「시리아」에 풍부한 면화를 써서 난민중의 부녀자를 동원, 새로 만들자고 이야기했다. 외국단체로부터 도움을 받는 게 그렇게 내키지 않는다니 「매트리스」에 「시리아」적십자사의 도장을 찍어 나누어주는 게 좋겠다고 충고를 했다.
이 박사의 「시리아」에서의 이러한 활동은 곧 「뉴스」의 초점이 되기도 했다. 미국의 CBS방송이 이박사의 난민구호사업내용과 그가 전하는 난민의 참상을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필름」으로 엮어 소개했다. 이 「필름」은 WCC의 사업자금 모금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시리아」측에서도 이 박사에게 만은 호감을 갖게되어 WCC를 통해 원조가 들어오면 달갑지 않지만 이윤구라는 인물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겠다고까지 말할 정도가 되었다.
「레바논」 「이스라엘」 「시리아」접경지대의 「크네이트라」지역에 2천 가구의 난민주택을 지은 뒤의 기념「파티」에서「크네이트라」주지사가 공식적으로 「미스터·이」가 북괴대사보다 「시리아」에 더 고맙고 중요한 인물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크네이트라」주지사를 비롯, 이 「파티」에 참석한 요인들이 모두 「시리아」·북괴친선협회 간부들이다. 이 때 들은 말이 무척 인상에 남는다고 술회하고 있다. <「카이로」=김동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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