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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묵한 사람들의 고함소리|김화영<고대 교수·불문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한국사람은 서구에서 자주「동방의 예지」, 혹은「항상 미소 지으며 과묵한 사람」의 인상을 주는 일은 잦다. 이 과묵함과 미소는 상당수의 경우 언어장벽을 적당히 모면하는 참담한 이면을 가지고 있는 수가 많아서 외국어 교사에게 실망을 주기도 하지만 사실 동양인, 아니 적어도 한국인이 가진 전통적인 과묵함과 은근한 미소에는 우리들이 정신 속 깊이 간직하여야할 균형이 내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들이 되찾아야할 귀중한 특성일 것 같다. 신비스러운 이야기 속에서 들은바 있는 대승들의 그 무언의 대화, 「이심전심」이라는 표현이 담고 있는 응변적인 침묵, 아니 시정의 범인인 우리조차도 다정한 친우와 말없이 온종일 함께 있어도 심심하지 않았던 몇 번의 흔하지 않은 경험, 이 모든 것은 사랑과 지혜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무언의 값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조상이 물려준 덕목이라고 해서 항상 우리가 그냥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과연「과묵」을「긍정적」인 차원에서 살아갈 수 있는 여건 속에 있는가? 우리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많은 주위 사정이 이 대답을 부정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도대체 우리 고유의 것을「되찾는다」라는 말 자체가 우리의 상실을 증언하고있다.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가? 이 거창한 질문을 거창하게 생각하면 인류학자·한국학자·역사학자·철학자에게 자문을 구해야겠지만 더 직접적인 대답은 우리들의 민감하고 정직한 몸과 건강이 줄 수 있다.
한국인도 동양인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절대로 조용하지 않다. 과목하지도 않다. 당장 거리에 나가 보라. 외국에서는 들어보기 어려운 자동차의 경적소리가『한국 운전사들은「클랙슨」에 손을 얹어 놓고 운전한다』는 외국인의 평을 단순한 과장만도 아니게 한다.
기차나「버스」를 타면 으례 최고의「옥타브」로 대화하는 고성능의 성대들이 흔하다. 평범한 시민들의 공동응접실인 다방은 마치 증권시장 같다. 유난히도 컴컴한 우리나라의 그 철저한 태양광선 기피증상의 다방에서는 최근 국산화 시책에 발맞춘 전축생산의 귀가 찢어질 듯한 효과가 경악과 함께 확인된다.
피곤한 귀로의 만원「버스」안에서 떠밀리며 귀마저 휴식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연속극의 울음소리나 약 광고의「씩씩한」고함소리나「사랑」을 도맡아서 다해주는 유행가는 때때로 우리를 절망시킨다. 「택시」차고 옆이나 고성능 복음을 전하는 교회 옆에 살면서 쉬 이사를 할 능력이 없는 서민은 자다가 깨어난 어둠 속에서도 한국인이 생각보다는 훨씬 덜 조용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술집에서는….
「롤랑·바르트」는 중공의 인상을「기호의 왕국」이라고 표현했다. 간판과 선전문귀가 난무하는 풍경을 그렇게 말했다. 과연「파리」에서 동경에만 와도 대형간판의 밀림 속에서 급작스런 피곤이 느껴진다. 「간판」들이 고래고래 고함친다」는 말은「간판」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그 숫자가 적지만도 않다)에게는 비유로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피부로 느껴진다.
남들처럼 무성한 가로수를 가꾸어 바람이 노래하는 도시를 만들지는 못할망정 연극 무대 같은 집들을 지어놓고 집의 절반을 차지할 듯한 간판에 출처가 분명치 않은 외국어가 일쑤인 옥호를, 선전문을, 구호들을 써놓고「플라스틱」과「페인트」문화를 과시할 것은 없지 않은가? 간판의 크기를 다같이 줄일 수는 없을까? 목소리를 다같이 낮출 수는 없을까? 그러나 나를 참으로 불안하게 하는 것은 저 고래고래 고함치는 높은 성대와 간판과 구호의 절규가 진정한「실어증」의 참담한 이면을 감추고 있지나 않나 하는 의구심이다.
나직나직, 차근차근 말하고 사는 사람만이 고함치지 않고도 살 수 있다. 너무 오래 과묵한 사람은 엉뚱한 곳에서 고함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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