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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냉전 시대의 개막|「마크·게인」<중공문제 전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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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3면

다음은 「캐나다」의 「터론토·스타」지 「칼럼니스트」인 「마크·게인」이 월남전 종식을 계기로 30년 냉전사를 총 정리한 해설기사다. 그는 72년 북한을 방문한 직후 한국을 방문, 남북한을 비교하는 기사를 「뉴요크·타임스」일요판에 쓴 바 있는 중공문제 전문가이다. <편집자주>
월남, 그것은 옛날의 비극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중공이 탄생하기전인 47∼48년은 유혈과 절망의 시기였다. 포성이 들려오는 속을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적과 아의 책모가 난무하는 가운데 사태는 급전되고 있었다.
중공군은 노도와 같이 농촌을 제압하고 장개석군은 도시로 밀려들었다.
「워싱턴」에서 파견된 「마셜」장군의 사절단 일행은 조종 역을 맡고 왔으나 실패했다.
「워싱턴」이 장개석을 포기할 때 미 해병대는 가지고 있던 무기를 장개석에게 넘겨줬다. 이미 제공한 군수품이 산처럼 쌓여 있는데도.
그러나 1년도 못돼 그 대부분은 「탱크」나 대포와 함께 퇴각하는 국부군의 재산이 돼버렸다.
여기서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은 중국의 경우는 「제1차 냉전」초기의 한 장이고 월남은 그 최후의 장이라는 점이다.
냉전은 제2차 대전 말기에 시작됐다. 그때 이미 연합군은 지도를 펴놓고 각자 지배하려는 부분을 먼저 점령하기에 혈안이 돼있었다.
65년 「워싱턴」이 월남에 출병했을 때 미국은 이 냉전을 계속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월남개입의 목적은 중공진출의 저지였다. 그 배경에는 북경은「모스크바」의 위성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잘못된 추측이 있었다.
「펜터건」전당에 진치고있는 천재적인 군인들은 「게릴라」전의 성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이공」은 기억에 남는 미국인 즉 완고하고 확신에 차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전혀 무식한 군인들을 차례로 맞아들였다.
유명한 「에도·란스텔」을 비롯, 「로버트·코머」(CIA출신), 그리고 「메콩·델터」의 귀신이라 불리던 「존·반」장군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들은 「게릴라」전에 대항하는 무수한 새 전술을 써보았지만 모두가 월남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미·소 초강대국의 세계 제패를 위한 장기투쟁의 과정에서 미국은 확실히 중국과 월남에서 패했지만 소련도 누누이 쓰라린 경험을 맛보아왔다. 「베를린」에서도 그랬고 한국에서도 그랬다.
한국전쟁의 경우 혹시 공산 측이 승리했다면 일본의 정치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소련은 48∼49년 「그리스」에서 쓰라린 고통을 맛보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냉전의 경과를 총괄하는 것은 아직 늦지는 않다.
지금도 서방측에서는 공포와 고통 속에서 남쪽으로 도망친 무수한 월남난민을 슬퍼하지 않고 월맹군의 진격에 환호하는 「평화 애호자」가 많은데 놀란다. 그들은 첫째 「하노이」의 승리를 가져다준 것이 민의의 귀결이 아니라 대포의 힘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비판의 자유가 있는 그들 자신의 자유로운 세계가 차츰 차츰 좁아져가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둘째 관점은 만약 구 사이공」정권이 월맹진공명령을 내렸다면 세계는 이를 1973년의 「파리」평화협정 위반이라고 공격목표로 삼았을 것임에 틀림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실로는 월맹의 터무니없는 월남진공에 대해 이를 「침략행위」라고 규정하고자하는 의견이 서방측에는 거의 없다.
세째 관점은 구「사이공」정권의 붕괴와 인구 4천5백만 남짓한 새로운 공산국가의 출현으로도 냉전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다만 냉전의 제1단계가 끝난데 지나지 않으며 우리들은 이미 세계적 규모의「제2차 냉전」단계로 돌입하고 있다.
「하노이」가 승리를 거둠으로써 앞으로 동남「아시아」에는 3개 공산국가가 함께 「헤게모니」를 잡으려 들것이다.
우리 눈앞에 이제 전개되는「드라머」는 훨씬 위험한 장래에 대한 한낱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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