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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거나 무기력하거나 … 보통 장애인 왜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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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연극 ‘테레즈 라캥’에서 열연하는 정원희(왼쪽)씨.

어두침침한 무대에는 휠체어 3대가 놓여있다. 왼편에선 흰색 셔츠를 입은 4명의 남자 배우가 휠체어 2대에 나눠 탄 채 온몸으로 절망을 표현하고 있다. 검은 원피스를 입은 여배우 4명은 오른쪽 휠체어를 둘러쌌다. 2명은 각각 왼손과 오른손을 앞으로 곧게 뻗고, 다른 1명은 나머지 1명의 목을 조른다.

 지난 1월 ‘장애문화예술연구소 짓’이 선보인 연극 ‘테레즈 라캥’의 한 장면이다. 에밀 졸라의 원작을 장애인의 감성으로 재구성했다. 지체·언어·청각 장애를 가진 배우들은 각자 연기하다가도 서로의 팔과 입이 돼 장애를 보완하며 한데 어우러진다. 입체적 인물 표현을 위해 각자가 지닌 살아있는 감각을 총동원하는 것이다. 이는 서울대 경영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정원희(23·여)씨가 빚어낸 작품이다. 지난해 장애연극 기획 및 예술교육을 위한 사회적 기업 ‘짓’을 설립한 정씨는 배우로도 직접 참여했다.

정원희

 정씨 역시 장애인이다. 선천성 뇌병변을 갖고 태어나 뇌성마비 2급 판정을 받았다. 정씨는 “장애예술은 장애인들이 하는 예술이 아니라 장애를 하나의 소재이자 모티프로 삼는 예술 장르”라고 규정했다. 때문에 20여 명의 구성원 중 장애인과 비장애인 비율도 엇비슷하다.

 정씨는 단순히 장애를 딛고 일어선 진부한 이야기가 아닌 몸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보편적인 미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길 원했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은 공부를 잘해서 성공한 장애인과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장애인으로만 구분된다”며 “연극을 통해 이 두 부류 외에도 평범한 딸, 누군가의 연인 등 중간자적인 존재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2009년 서울대 경영학부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회계학자를 꿈꿨다. 예술사업가로 변신한 데는 직접 무대에 선 경험이 한몫했다. 정씨는 2011년 극단 파전이 올린 연극 ‘매직타임’의 헤로인 오필리어를 맡았다. 그는 “뇌성마비 배우가 칼싸움은 할 수 없지만 휠체어 기마전은 가능하고, 청각장애인 배우는 누구보다 감동적인 수화 독백을 선보였다”고 했다.

 사회적기업진흥원의 육성 사업으로 선정됐던 ‘짓’은 이제 창작을 준비하고 있다. 올 여름에는 프릭 쇼를 올릴 예정이다. 기형적인 신체를 소재로 웃음거리로 만드는 프릭을 모티프로 장애 당사자들이 직접 자신들의 경험담을 담은 극본을 쓰고 있다.

 공연·교육과 함께 연구도 병행한다. 극장의 휠체어석처럼 청각·시각 등 모든 장애인의 편안한 관람을 위해 매뉴얼을 작성하고 애플리케이션 개발 등도 연구하고 있다. 연말에 책이 발간되면 국공립 공연장을 중심으로 배포하고 컨설팅을 할 계획이다.

 이들의 롤모델은 영국의 칙인쉐드(Chickinshed)다. 장애인 배우만 250여 명에 달하는 이 극단은 고전을 재해석한 공연으로 세계적인 연극 공연축제인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정씨는 “영국예술위원회는 국고보조금의 2%를 장애인 예술활동에 지원하는 데 비해 한국은 문화예술 예산의 0.2%만 쓰고 있다”며 정부 지원을 아쉬워 했다.

이상화·민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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