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메르」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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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크메르」의 항복을 누가 제일 서러워할까? 몇 주전 「론·놀」은 「프놈펜」을 떠나는 비행기에 오르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의 아내는 눈에 댄 손수건을 끝내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는 마냥 서럽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발리」의 관광지에서 2주일을 즐긴 다음에 그는 이제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있다. 미국정부가 그를 깍듯이 대접하고 있는게 틀림없다.
그가 빈손으로 망명길에 올랐을리도 없다. 지난 3월에 「론·놀」과 「티우」는 의약품을 싣고 「사이공」에 날아온 서독적십자의 전세기를 이용해서 16t의 금괴를 「스위스」에 반출하려 했었다.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티우」나 「론·놀」만한 권력자가 다른 수를 꾸며내지 못했을 까닭이 없다.
「론·놀」은 70년에 「시아누크」를 몰아낸 다음 꼭 5년 동안 「크메르」에서 영화를 누릴 만큼 누려왔다. 나라를 아끼는 마음이 유달리 강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니 조국을 떠난다고 진실로 살을 베는 듯한 아픔을 느낄 까닭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16일 조국에 남아 죽음을 택하겠다는 어느 「크메르」고위관리의 사신을 미 상원세출위원회에서 읽으면서 「키신저」는 울먹였다. 그는 무엇이 서러웠을까?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죽음이란 언제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법이다. 그리고 미국 사람들에게는 묘하게 감상에 약한데가 있다.
더욱이 「키신저」는 탁월한 「드래머티스트」이기도 하다. 「크메르」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중단이 오늘의 비극을 가져 왔다고 상원의원들을 설득하는데 있어 그가 눈물을 연출했다고 볼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아무리 「크메르」의 비극이 크다 해도 결국 미국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대안의 불이나 다름없다. 「프놈펜」의 대사관 위에 휘날리던 성조기를 걷어 옆에 끼고 「헬리콥터」로 「크메르」를 철수한 「딘」 미국대사도 서러워했다. 그것은 미국외교사상 유례없는 패배를 자신이 연출하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을 따르고 미국에 기대어 살던 「크메르」의 수십만 시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게 안타까워서였다고 만은 볼 수 없다.
오늘 「프놈펜」의 거리에는 총성이 없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없다. 입성하는 「크메르·루지」 병사들에게 박수를 치는 시민들이 많았다고 한다. 정말로 반가워서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위의 본능이 박수를 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눈물이 없는 것도 아니다.
눈물을 흘릴 여유가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슬픈 것은 「캄보디아」의 사람들이다. 그들의 뼈에 맺힌 슬픔과 분노를 「포드」대통령인들 알아차릴 턱이 없다. 그들에게는 전혀 출구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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