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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만 있고 책임 안 지는 금융지주 회장 제도 고쳐야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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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호 21면

서울 마포의 한국 FP협회 집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윤병철 회장. 최정동 기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난 사람은 흔치 않다. 더욱이 자신이 만들고 키운 은행의 행장 자리라면 더욱 그렇다. 이전투구로 얼룩진 국내 은행가에선 ‘천연기념물’에 가깝다.

50년 금융인생 회고록 펴낸 윤병철 한국재무설계사(FP)협회장

1997년 3월 26일 3연임을 목전에 두고 하나은행장에서 물러난 윤병철 한국재무설계사(FP)협회장 이야기다. 그가 50여 년의 금융인생 역정을 담은 회고록 『금융은 사람이다』를 최근 출간했다. ‘스스로 은행장직에서 물러나다’가 책의 1부 제목이다. 하나은행을 후계자에게 물려준 뒤 그는 5개 부실 금융회사의 집합소였던 우리금융지주 회장을 맡았다. 꽃가마를 마다하고 부실은행 정리반장을 자처한 셈이다.

그 뒤 3년 만에 우리금융지주를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시킨 뒤 그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열정을 쏟고 있는 일은 후진 양성이다. 미국의 국제공인재무설계사(CFP) 제도를 국내에 보급하고 있는 FP협회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한창 잘나가던 때 하나은행장에서 물러난 이유가 뭔지요.
“하나은행장을 연임하기 전에 한국투자금융에서 이미 사장을 두 번 했어요. 최고경영자(CEO) 자리에만 10년 있다 어느 날 깜짝 놀랐습니다. 초임 시절 밤잠 설쳐가며 고심했던 걸 아무렇지 않게 결정하는 자신을 발견한 거예요. 은행엔 사활이 걸린 일인데 저에겐 늘 하는 일상이 돼버린 거죠. 아차 싶었습니다. 마침 김승유라는 걸출한 후계자도 있었고.”

-밖에서 보시기에 하나은행은 잘하고 있나요.
“하나은행은 저에게 분신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쓴소리도 할 수 있죠. 98년 외환위기 때 국내 은행은 죄다 이합집산을 했잖아요. 그런데 합병이란 게 어느 나라에서나 성공 확률이 30% 정도밖에 안 돼요. 완전한 통합을 위해선 조직의 DNA를 간직한 헌신적 주류 집단이 있어야 해요. 하나은행은 출발이 늦었던 데다 보람·서울·외환은행을 합병하면서 주류 집단이 많이 희석됐어요. 80년대 상업고교 출신이 똘똘 뭉쳐 출범한 신한은행은 그런 면에서 강하죠. 하나은행은 초심을 늘 잊지 않아야 해요.”

-외환위기 이후 국내 은행도 지주회사로 진화했는데 지주회사 회장과 은행장 간 알력이 자주 노출됐습니다.
“국내 금융지주회사는 출발부터 미국과 달랐습니다. 미국에선 증권업과 은행업을 분리한 1930년대 글래스-스티걸법을 무력화하려고 지주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지주회사가 그룹 전체를 총괄하는 총사령부가 됐죠. 자연스럽게 지주회사 회장이 경영권과 책임을 함께 지는 구조가 정착됐습니다. 계열사가 나뉘어 있지만 사실상 하나로 움직이는 거죠. 그런데 국내 지주회사는 처음부터 은행 중심으로 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은행에선 ‘지주회사는 배당이나 받고 경영엔 간섭 말라’는 기류가 생겼죠. 이를 절충하다 보니 지주회사 회장은 막강한 인사권만 갖고 책임은 안 지는 ‘사천왕’이 됐습니다. 지주회사로 묶어놓고도 여전히 은행연합회, 보험협회, 증권협회로 나뉘어 있는 업계 구조도 문제지요. 금융감독원도 마찬가지고요. 지주회사의 이점을 살리자면 보완이 필요합니다.”

-최근 카드 사태를 보면 금융회사 보안 시스템이 여전히 취약한 것 같습니다.
“외부 해킹을 막는 장치를 아무리 보강한들 사람이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어요. 이번 개인정보 유출 사건도 외부가 아니라 내부 기술자가 저지른 거잖아요. 정보를 빼낸 기술자가 USB를 들고 들어갔을 때 어느 은행에선 보안담당자가 이를 제지했고, 다른 은행에선 그냥 놔뒀죠. 이 작은 조직문화의 격차가 엄청난 차이를 낳았습니다. 조직이 커질수록 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철저히 이뤄져야 합니다. 사고가 터질 때마다 책임자 몇 명 경질하는 걸로는 해결이 안 돼요.”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골드먼삭스 같은 투자은행(IB)을 육성하자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잘 안 됐습니다. 왜 그런 겁니까.
“은행은 예금을 받아서 대출을 해주죠. 이와 달리 IB는 예금 없이 전주(錢主)와 기업을 연결해주는 일을 해요. 은행이 하기 어려운 곳에도 IB는 돈을 돌게 할 수 있는 만큼 IB 비중은 앞으로도 커질 겁니다. 그런데 국내 은행은 좋은 일은 혼자 독차지하려 하지만 손해 보는 일에선 다 도망가요. 이러니 IB가 클 수 없는 겁니다. 미국 월가가 IB의 메카가 된 건 위험을 기꺼이 나눠지려는 IB가 많고, 거기서 일하는 전문가가 서로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에요. 전문가 한두 명 스카우트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자 일본 노무라가 리먼의 아시아조직을 인수했지만 소용없었어요. 시스템이 받쳐줘야 합니다.”

-국내 금융회사가 앞다퉈 해외 진출에 나서고 있는데 뚜렷한 성과는 아직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외국에 지점만 설치하면 국제화라고 착각하고 있어요. 해외지점 가보면 죄다 서울 본점만 바라보고 일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빨리 본부로 들어갈 수 있을까, 이 생각만 하니 국제화가 안 되죠. 다만 느리긴 해도 진전은 있더군요. 얼마 전 인도네시아에 갔다가 현지 하나은행 지점장이 콧수염을 기른 걸 봤어요. 그런 자세가 필요해요.”

-현재 진행 중인 우리금융지주 민영화, 어떻게 보십니까.
“뉴욕증시 상장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닙니다. 이익도 내야 하지만 계열사와 연결된 재무제표를 5년치 소급해서 만드는 작업부터가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이렇게 어렵사리 만든 지주회사를 계열사별로 쪼개 팔아야 하는지 재고해 봐야 합니다. 노조 반발로 통합이 무산된 광주·경남은행을 떼내 파는 건 몰라도 이미 통합된 증권 자회사까지 분할 매각하는 건 공적자금 회수 측면에서도 손해입니다.”

-재무설계사 육성이 필요한 이유는 뭔가요.
“흔히 ‘우리 애는 돈 몰라요’란 말을 하잖아요. 그러니 나중에 어른이 돼서도 돈만 많이 벌면 다 되는 줄 알아요. 자신의 실제 경제적 능력과는 점점 동떨어진 일확천금만 꿈꾸게 되는 거죠. 그만큼 불평·불만만 쌓입니다. 돈이란 게 삶의 수단인데 거꾸로 삶의 목표가 되면 불행해집니다. 자신의 경제적 능력을 정확히 알고 이에 맞춰 씀씀이를 설계한다면 삶의 질은 더 높아질 겁니다. 특히 우리 사회가 급속하게 노령화하고 있어서 재무설계의 필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어요.”



윤병철 한국FP협회장은 1937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농업은행(현 농협)을 거쳐 1962년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경련)에 입사했다. 65년 세계은행(IBRD) 산하 국제금융공사(IFC)와 합작으로 설립한 국내 최초의 민간 주도 금융회사인 한국개발금융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이후 장기신용은행과 국내 최초 단자회사인 한국투자금융을 거쳐 91년 하나은행 전환 뒤 두 차례 은행장을 역임했다. 2001년 우리금융지주 회장을 맡아 2003년 9월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시키고 이듬해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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