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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바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언젠가 미국의 한 「컴퓨터」회사에서 「컴퓨터」에 10만이 넘는 바둑의 정석을 알려주고 인간기사와 대전시켜 보자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물론 실현되지는 않았다. 사람이 「컴퓨터」를 이길 것이 빤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사람의 뇌는 무게가 1kg 남짓밖에 되지 않지만 그 속에 1백40억개의 세포가 들어있다. 여기에 비겨 「컴퓨터」의 인공두뇌는 아직까지도 진짜보다 몇 십만분의1도 신경세포를 갖고있지 못하다.
따라서 「컴퓨터」는 이른바 묘수나 새로운 정석을 꾸며내지는 못한다. 더욱이 바둑의 수는 무한에 가깝다.
「컴퓨터」가 사람을 이길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지난 68년에 「시카고」에서 15세의 한 소녀에게 책을 읽히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이때 그 소녀는 1분간에 5만 단어를 읽었다. 소녀의 뇌는 매초 4만개 이상의 「알파벳」으로 엮어지는 「데이터」를 받아들이고 또 처리했다는 얘기가 된다.
제아무리 정교한 「컴퓨터」라도 이처럼 빨리, 이렇게 많은 「데이터」를 처리하지를 못한다. 그런데 바둑의 정식대전에는 일본의 경우 6시간이라는 시간제한이 있다. 따라서 종반에 가면 초읽기에 몰리기가 일쑤다.
지난번 혼다 9단과의 대전에서도 조치훈군은 두 국이나 초읽기에 몰렸었다. 그때 조 군은 직관으로 두어 나갔다.
「컴퓨터」에는 직관이 없다.
따라서 막판에 갈수록 「컴퓨터」는 소요시간이 길어진다.
그러나 「컴퓨터」는 인간이 이겨낼 수 없는 강점을 갖고있다. 「컴퓨터」는 감정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감정에 흔들려서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없다.
지난번에 조치훈군이 영광의 순간 일보 전에서 패퇴의 눈물을 흘리게 된 것도 감정에 흔들린 때문이었다. 바둑은 기억력이 가장 왕성한 어릴 때부터 배워야한다. 그렇다고 천재소년들이 최고봉에 오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한판에 10시간 이상이 걸리는 바둑의 대국은 가장 긴박한 심리전쟁이나 다름없다. 이것을 이기는데는 단순한 기나 재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래서 바둑이 하나의 예나 다름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어제 있었던 일본의 「프로」10걸전 결선의 첫 대국에서 우리의 조치훈군이 가토오 8단을 반집으로 이겼다. 가토오 8단은 내일의 일본 기계를 대표할 기사로 꼽히고 있다. 조군으로서는 같은 스승에게 배운 선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도 심리의 동요가 없었던 것 같다. 복기에서 보면 완착이 하나도 없었다. 지난번 혼다와의 대국이 조 군을 갑자기 인간으로서 원숙하게 만들어준 모양이다.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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