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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6)<제자 선우 진>|<제44화>남북협상(36)|선우 진 -38선의 감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돌아온 원점 38선 푯말 앞에는 마중 나온 30여명이 벌써부터 진을 치고 있었다. 기동 차를 타고 왔다는 코 큰 기자와 우리 기자 및 낯익은 친지의 얼굴 등등. 선상은 흥분이 넘쳤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광동 일군 점령 지역에 침투, 교포 선무 공작을 폈던 광복군 제3전구 소속 옛 동지 신정숙씨(여·당시 36세쯤·현재 대전거주)가 꽃송이를 한아름 백범에 안기는가 하면 협상의 결과를 캐기에 성급한 내외보도진은 숨돌릴 새도 없이 질문을 퍼붓는다. 카메라를 들이댄다, 야단법석들이었다.
돌아온 사자들에 대한 환영이라기보다 차라리 민족의 비원에 쏠리는 내의의 관심들이었다. 그러나 북행 17일의 발걸음이 멈춰진 그곳 푯말 앞에는 38선이 그대로 있었다.
허허벌판, 눈에도 안 보이는 선에 발목이 잡힌 채 북쪽으로는 여전히 한발 짝도 더 못 내딛고선 자리서 우리들을 맞이할 뿐.
어쩌다 사진을 찍느라 한발 짝이라도 넘으면『여기는 우리 땅』이라며 우리를 따라온 호위병들이 사정없이 밀쳐 내는 등 그 선은 한치의 에누리도 없었다.
코 큰 기자들이 그럴 때는 더욱 기승이었다.
한 민족을 끝내 갈라놓고 말 듯한 이 형체도 없는 마의 금-. 통일협상 길의 종점에서 벌어지는 이 금 앞의 장면에 민족을 위해 북을 다녀왔다는 자부들은 일순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모든 게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갈 때의 부푼 기대와는 달리 남의 땅으로 넘어서는 백범·우사 동의 발길은 무겁기만 한 것이었다.
1948년 4월 19일 대망의 북행 길에 올랐던 남북협상 17일의 역정은 이로써 피날레-.
서울로 돌아온 백범과 우사는 이날 낮 2시쯤 경교장과 삼청장서 청년학생·내외기자들을 각각 만나 협상소감을 술회했다.
『이전 회담은 성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잘 될 것으로 생각한다. 첫 숟갈부터 배부를 수는 없다. 나는 그들이 서울로 와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회담을 하겠다면 기꺼이 그 심부름꾼이 되겠다』(백범)『첫 스텝이 중요하다. 결코 이번 북행이 헛된 일이었다고는 보지 않는다』(우사)는 등의 요지였다.
이어 이튿날 두 분은 양 김 공동성명을 발표, 민족 앞에 회담결과를 보고했다.
▲남조선 단정반대 ▲양군 철수요구 ▲전국 정치 위를 봉한 통일정부수립 방안 ▲단전· 단수 문제해결 등 합의사항을 소상히 밝힌 외에 ▲북조선도 단정은 절대 수립 않겠다는 확언을 했다고 전하고 ▲통일정부 수립과정에서 민족 상잔 극은 결코 없을 것을 확인한 것이었다.
남북협상은 실패한 것도, 실망할 일도 아닌 오로지 첫 스텝으로 동포전체가 앞으로 일치 단결, 노력한다면 최후의 성공을 거두리라는 기대에 찬 보고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나흘 뒤 5·10 총 선이 현실화하고 8월15일과 9월 9일 남과 북의 단독 정부가 잇따라 수립됨으로써 두 지도자의 노력과 기대는 모두 한 순간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토록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동족상잔 극마저 무참하게도 현실화, 두 분의 마지막 비원까지 짓밟아 버렸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깊은 의의를 감출 길 없는 슬픈 민족사가 아닐 수 없는 것.
돌이켜 보면 북행 길은 통일을 의해서라면 공산당과도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공산당의 속성을 모르고 시도한 일종의 도의적 구국운동을 못 벗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그때 협상 파는 통일 실상의 센티멘털리즘으로 몰리고 반대파는 통일을 반대하는 양 협상 파에 대해 오해를 받기도 하는 등 찬·반 입장이 엇갈렸으나 따지고 보면 구국일념만은 같은 것.
한쪽은 끝내 명분에 투철했고 한쪽은 현실에 충실한 것이 다르다면 다르다고 나 할까. 그러나 역사는 끝내 명분론을 버리고 현실 론을 택하고 만 셈이나『우리 일은 우리 손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앞세우고 붉은 땅까지 서슴지 않고 찾은 양 김씨의 통일 독립운동은 그 역사가 언젠가는 따로 평가할 날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남북통일의 길이 아무리 멀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기에 그렇게 믿는 것이다.
그동안 이 남북협상을 연재하면서 사실 확인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기역에 의존한 부분이 많아 본의 아니게도 착오가 불소 할 것으로 믿는다.
이점 관계 여러분들의 해양을 구하면서 바로 잡을 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우선 19회 최 하단 중「변절한 홍기조씨」는 33인이 아닌 동명이인의 목사임이 밝혀져 바로 잡는다. 관계 자료 및 증언을 보태 준 인사들에게 사의를 표한다. <끝>
다음은 조경한씨 집필의『상해임시정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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