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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의 정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프랑스 사람들은 2차대전때 나치 독일에 대하여 폈던 레지스탕스 운동을 매우 자랑으로 삼고 있다.
감동적인 저항문학도 많았다. 벨쿨 사르트르 카뮈 모리악…. 실제로 총을 들고 싸운 지성도 많았다.
세계적인 사가 사르크·불록은 60세때 저항운동을 하다 잡혀 16세의 소년과 함께 총살되었다.
우리에게 낮익은 명화 카사 블랑카를 보면 술집의 여급까지도 독일군 앞에서 과감히 프랑스 국가를 부른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이다. 지난 71년에 프랑스에서 공개된 『프랑스 1940∼45년의 진실』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면 당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한 것은 영국의 정보조직과 한 주먹의 프랑스 인들이었다.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하고 있었다.
가령, 나치의 특수부대에 지원한 프랑스인은 1만2천명이 넘었다.
히틀러가 파리를 방문했을때 파리 경찰은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했다.
그런가하면 톱·스타이던 대니얼·다류 비비앙·로망스 같은 여우들은 베를린까지 가서 독일 광객들에게 아첨했다. 나치 점령 하에서도 파리의 유흥가는 여전히 웅성거리고 있었다.
주권과 자유를 잃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목숨을 내걸고 민족과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겪었던 상황 못지 않게 가혹했던 것이 일제치하의 한국민이었다. 그런 속에서 헤아리 수 없이 많은 우리 어버이들은 독립을 외치다 숨진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 추원, 육당의 변절에 대한 생각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만약에 우리가 그들이었다면 과연 그들과 달리 처신할 수 있었겠느냐는 자책 또는 자조 때문이라 여겨진다.
일제시대에 암흑 속에서 꾸준히 광명을 믿고 또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고 또 암흑을 벗어나겠다고 몸부림친다는게 보통 사람의 용기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33인 가운데에도 끝까지 초지를 굽히지 않았던 분은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분들을 마냥 탓할 수만 있을까. 한·일 합병의 조약이 이뤄지던 치욕의 날, 서울 종로의 상가는 평일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런 속에서 「만세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과연 무엇이 우리의 눈을 뜨게하고, 무엇이 우리의 용기를 일깨워 주었을까.
우리는 또 다시 3·1절을 맞는다. 한때 이날에 느끼던 기쁨이 이제는 없다. 흥분도 이젠 아득한 옛날의 추억처럼 퇴색해 가며 있다.
왜 그럴까? 상황은 그때와는 전혀 다르다. 다만 3·1운동을 지탱하던 그 용기와 민족적 긍지가 지금 어디 있는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육당을 탓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는게 안타까운 요즘의 세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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