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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이슬람 스타일에 전통·과학 곁들였더니 세계가 반한 스페인 맛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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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호 17면

필자가 유럽으로 요리 유학을 떠난 것은 맛있는 음식을 현지에서 오롯이 먹기 위해서였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파에야. 그 짭조름한 맛이 당겨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건너가 레스토랑에서 일을 시작했다. 스페인어 한마디 못하는 스페인 생활은 고됐다. 그중 필자를 가장 당황하게 만든 것은 의외로 스페인 사람들은 파에야를 많이 먹지 않는다는 사실. 가끔 레스토랑 직원식으로 나온 파에야는 알던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레스토랑에서 일한 지 어느 정도 지나서야 이유를 알게 됐다. 스페인을 대표할 만한 음식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다는 것, 한 가지 메뉴라도 식재료를 달리해 레시피가 적게는 여럿, 많게는 수백 개에 이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2월 19일~4월 29일 열리는 ‘타파스: 스페인 음식 디자인’전

이베리코 하몽, 초리조, 샤프란, 올리브 등 다양한 식재료는 물론 리오하를 중심으로 프리오랏 등 지역별 다양한 와인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의 식문화는 정말 다양하고 매력적이다. 또 카탈루냐, 안달루시아, 갈리시아, 바스크 등 지역마다 뚜렷한 차이를 보이며, 각 지역의 자부심으로 이어진다.

19일 찾아간 ‘타파스:스페인 음식 디자인’전(2월 19일~4월 29일 서울 중구 수하동 센터원빌딩 2층)은 스페인의 식문화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스페인 국가문화활동협회 공동 주최로 열린 이번 전시는 총 200여 점의 전시품을 통해 스페인 음식 문화와 주방 디자인의 발자취를 보여준다.

그 발자취를 소개하는 방식도 스페인 음식의 특징을 차용했다. 바로 타파스(Tapas). 타파스란 주 요리를 먹기 전에 작은 접시에 담아 먹는 전채 요리로 음식에 덮개를 덮어 먼지나 곤충으로부터 보호한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스페인 음식이 워낙 다양해 각기 다른 단품 요리를 조금씩 덜어 모두 맛보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이번 전시는 스페인 식문화를 세 가지 타파스라는 키워드로 분류했다.

부엌·식탁·음식 세 가지 키워드로 분류
첫 번째 타파스는 키친, 즉 부엌이다. 스페인의 식품 산업은 스페인 전체 수출 산업 비중의 약 20%에 달한다고 한다. 음식을 더욱 맛있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스페인 부엌용품 덕분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유명 셰프들과 일했던 디자이너들의 상상력까지 더한 부엌용품도 만날 수 있다. 예컨대 손가락 끝에 골무처럼 끼워 사용할 수 있는 미니 커트러리 3종(포크·스푼·나이프)은 음식을 색다른 방법으로 먹을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식사 에티켓과 일상의 편의 사이에서 위생적인 식사방법을 찾기 위한 합의점이기도 하다.

최근 요리를 취미로 하는 사람이 늘면서 부엌용품과 식기도 기능은 물론이고 감각적인 디자인이 강조되고 나아가 환경 보존이나 에너지 절약 등 자원의 효율성까지 고려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전시장에서는 여러 단계에 걸쳐 변화된 주방용품 및 부엌의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타파스는 테이블, 즉 식탁이다. 미식가가 아니더라도 스페인의 대표적인 레스토랑인 엘불리를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쉽게도 현재는 폐업한 상태이지만, 미슐랭가이드에서 별 셋을 받고 유수한 미식평가기관에서 최고의 평점을 받은,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꼽히는 곳이다. 그곳 주방의 모습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은 영화 ‘엘불리:요리는 진행 중’을 보면 우리가 아는 주방의 모습과는 사뭇 다름에 놀라게 된다. 수석 셰프 페란 아드리아는 이미 세상에 알려져 있는 요리들을 용납하지 않고 오직 새로움을 추구한다. 이를 위해 그는 음식을 과학적으로 접근해 변형시키거나 새로운 음식으로 탄생시킨다. 액체질소, 스포이드, 주사기 등이 있는 그의 주방은 과학실험실을 연상케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페란 아드리아의 식탁을 장식했던 다양한 과학기구들을 비롯해 요리의 경계를 확장시킨 조리 기구들도 볼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세계적 트렌드가 됐던 분자요리의 본산인 만큼 예상치 못한 조리기구가 등장한다. 요리를 돋보이게 하는 소품부터 테이블·의자·램프 등 식사 관련 각종 아이디어 기구가 볼거리다.

마지막 타파스는 푸드, 즉 음식이다. 로마인과 북아프리카계 이슬람인들의 지배 아래 음식 문화가 섞이면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스페인 음식문화가 여타 유럽 국가들과 다른 독립성을 띠게 된 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오죽하면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일컬어 “피레네 산맥 남쪽은 유럽이 아니다”고 까지 했을까. 이질적인 것들이 한데 엉켜 새로움을 창조하고, 전통을 재해석하며 새로운 과학기술을 접목하는 노력이 지금 스페인의 음식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 이유일 것이다.

음식을 문화로 끌어올린 민관의 소통
매년 마드리드에서 개최되는 ‘마드리드 퓨전’은 세계 최정상 스타 셰프들이 대거 참가해 세계 곳곳의 식재료와 조리법 트렌드 등을 공유하는 무대다. 국내에서도 대표 외식기업 중 하나인 샘표에서 ‘한국의 장과 발효의 세계화’를 위해 적극 후원하고 있다.

스페인의 외식 산업이 이토록 급속도로 성장한 배경에는 최상급 식재료를 각 지역에서 공급받을 수 있는 지리적 환경도 물론 있지만 정부와 민간 사이의 긴밀한 협력과 외식을 단지 ‘음식’으로만 보는 일차원적 사고를 넘어 ‘문화’적으로 접근한 부분이 크다. 과학과 감성을 녹여내어 만들어낸 ‘요리’에 걸맞은 예술적 형태의 식기와 와인 관련 도구까지 한데 어우러짐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여기에 정부의 든든한 지원에 힘입어 재능 있는 셰프들이 과학적 분자요리와 예술적 아방가르드 퀴진을 세계적으로 유행시키며 스페인을 21세기 미식의 가장 중요한 거점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의 미덕은 전통적인 요리 방법에서 벗어나 세련되고 아방가르드한 레시피를 소개하고, 음식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식료품 광고, 음식 디자인 및 브랜드의 변천사, 요리사와 디자이너의 컬래버레이션, 친환경적 디자인 등 음식과 디자인이 한데 어울리는 모습까지 관람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스페인 음식 문화가 어떻게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는지를 보여주는 장이다. 단 음식은 맛볼 수 없는 전시라는 점은 잊지 마실 것. 그럼, 부엔 프로베초(Buen provecho·맛있게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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