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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방콕에 정착한 전 영화감독 이경손씨(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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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25동란·남북분단, 그리고 그 이후의 정당 불안 등 고국에서 들려오는 잇단 보도들은 모두 이씨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들뿐이었다.
게다가 고국에 생존해있던 유일한 혈족인 가형마저 전쟁의 북새통에 죽었다는 부음이 날아들었을 때 그는 귀국을 단념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국에 대한 짙은 향수는 쉽사리 없앨 수 없었다. 그는 우연히 남방징용으로 태국에 끌려갔다가 일본의 패전과 함께 방콕에 눌러앉은 교포10여명을 발견했다. 이국에서 동포보다 좋은 친구는 없었다.

<교포들에 태국어·영어교육>
그는 자청해서 돈 없고 말 안 통하는 이들의 생활상담역이 되었다. 이들이 태국사회에 정착하려면 장사를 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자면 태국어·중국어·영어중 한가지는 할 줄 알아야한다.
그래서 이씨는 밤마다 이들을 자택에 불러놓고 아내와 번갈아 가며 강사가 되어 태국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이중 가장 성실하고 영리했던 이종화씨(작고)는 태국처녀와 결혼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사업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이씨 자신의 사업은 태국정부의 잦은 법령개정으로 고전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씨는 때마침 방콕 에 우리대사관이 생기자 한동안 목재수출업 에서 손을 때고 이종화씨와 더불어 한국물품수입에 열을 올렸다. 한국물품을 태국에서 팔기란 무척 힘들었다. 가령 양말을 예로 든다면 기껏 수입해오면 태국업자들은 왜 견본과 현품이 다르냐, 왜 포장지에 영문과 대문표시가 없느냐, 왜 양말이 무지하게 두꺼우냐는 등 갖가지 클레임을 해왔다.
그럴 때마다 서울의 답장은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니 걱정 말라』는 것이며 『주문이나 많이 하라』는 태도였다. 이씨의 한국물품수입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그는 발동기수입상으로 전업했다. 태국은 국토의 전역이 수로로 얽혀있기 때문에 선박용 발동기의 수요가 급증. 이씨는 의외로 재미를 봤다. 여기에서 번 돈으로 그는 방콕교외에 토지를 대거 구입했는데 도시확장에 따라 이의 현 싯가가 30만 달러로 껑충 뛰어 사업에서 사실상 은퇴한 지금도 이 수입으로 생활하고 자녀들의 교육비를 충분히 대고있다.
그럭저럭 나이 70이 넘은 그는 현재 모아놓은 재산으로 자녀들 뒷바라지를 하고 틈틈이『꼭 써보고 싶은 책』을 쓰는 것을 낙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그는 현재 자신의 처지를 체호프 의 단막희곡 『백조의 노래』주인공에 비유했다. 이 희곡은 늙은 배우가 혼자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지내온 일생을 독백하는 내용이다.
요즘도 태국신문사 몇 군데서 상해시절의 이야기를 써달라는 청탁을 해오고 있으나 그는 이를 일체 거절하고 『동방의학의 기적』 『인간두뇌의 신비』 『이 느린 세상』등 다분히 철학적인 영문 감상 집을 발간했다.

<세 딸에 빵 굽는 기술 가르쳐>
절대 놀고먹는 것을 싫어하는 부인은 요즘도 파이 빵을 만들어 팔고있다. 또 이씨는 빵 꿉는 기술을 세명의 딸들에게 모두 가르쳐 주었다. 이유인즉 전쟁이 터지고 사회가 어지러울 경우를 대비, 여자는 몸팔지 않고 살아 갈 수 있는 기술을 한가지씩은 꼭 가져야 한다는 것. 오랜 인생유전의 생활철학에서 나온 그의 신념이다.
첫딸 까르나양(23)은 지난해 방콕의 출라 대학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영국의 웨일즈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씨는 이 딸을 한국에 유학시키기 위해 이대에 편지를 냈으나 아무 회답이 없어 포기했다고 한다. 둘째·세째 딸은 쌍둥이로 현재 대학통계학과 3년생이며, 외아들 메따군은 공대1년생. 이 4명의 자녀교육비가 한 달에 1천5백 달러나 된다고 한다.
그는 자녀들에게 3년 동안 한국어를 가르쳐 큰딸은 제법 의사소통이될 정도.
그러나 이씨 자신은 태국 땅에 벼를 묻을 것이며 조국에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나이 들어 조국에 가봤자 할 일도 없으며 자녀들이 한국생활에 전혀 생소해 적응해 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국에 있으면서도 놀라울 만큼 고국 소식을 소상히 알고 있는 그는 한국정부의 문화외교정책에 대해 몇 가지 조언을 했다. 그의 지론은 태국처럼 국민들의 평균적인 문화수준이 낮은 나라에는 고전무용단이 백날 와봐야 외교적인 효과는 별로 없다는 것.

< 『동방의학의 기적』등> 집단.
차라리 패티김을 보내 태국이나 미국의 유행가를 부르게 한다든지 김지미를 보내 태국사람들과 합작으로 멜로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실리적이라는 주장.
그러면서 그는 10년전 한국영화 『성춘향』을 태국에 수입했다 실패한 이야기며 현재 방콕 의 영화판에서 상영중인 극영화 『증언』이 흥행부진 속에 고전하고있는 실례를 들었다. 특히 그는 민족전쟁을 잔인하게 묘사한 『증언』은 태국관객의 공감도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대국적으로 보면 국위선양도 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50여년을 고국에 한번 안가고 떠돌아 살아온 탓인지 그에게는 한국인의 감상적인 애국심 표현보다는 중국인 풍의 이지적인 논리가 항상 앞선다. 그의 생활태도 역시 마찬가지로 중국식. 딸들이 부동산을 처분해서 여생을 호화로운 생활을 하라고 권하면 그는 항상 『돈을 저축하려면 땅파 벽돌을 사라』는 중국속담을 들어 딸들을 설득한다.
그리고 그는 이국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민족적인 자부심을 잃지 않고 끈질긴 근면정신을 후손들에게 남겨 그들이 지금 동남아의 도처에서 경제권을 쥐고있는 화교들을 본받으라고 타이른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그는 남긴 것도 없고 떠돌다만 일생이지만 『이대로 살겠다』며 웃는다. <방콕=전육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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