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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방콕」에 정착한 전 영화감독 이경손씨(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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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커미션」을 적게 받을 터이니 일을 맡겨달라』는 이씨의 애소는 의외로 쉽게 화상의 마음을 움직여 이씨는 곧 수출중개를 맡을 수 있었다. 그가 곧 착수한 일은 화상이 태국 각처에서 목재·「와니스」재료 등을 수집해 오면 이를 사갈 고객을 미국·일본 등지에서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 업무는 어떻게 정확하게 외국의「바이어」를 골라내 편지로 이쪽의 상품을 선전하고 그쪽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느냐에 일단 일의 성패가 달려 있었다.

<"「커미션」적게 받겠다" 애소>
따라서 정확하고 호감 사는 영어문장을 구사하는 것이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국제간 교역이 지금처럼 활발하지 못한 당시엔 이 분야에 전문가라고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태국에는 별로 없었다.
우선 이씨의 계산은 들어맞은 셈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별다른 경험없이 이 분야에서는 곧 전문가로 자처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문학영어와 상업영어가 약간 다르다 하더라도 영문희곡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상용서간문을 영어로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 운이 좋다고 생각할 만큼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첫 실적으로「와니스」원료 20만「달러」어치를 미국에 팔았고 이어 목재를 상당량 일본에 수출했다.
여기에서 받은「커미션」으로 이씨는 상당액의 돈을 쥘 수 있었고 생활도 윤택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안정도 불과 2년여. 또 다시 시대가 가져온 불운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소위 대동아 전쟁이 터진 것이다. 일본군은 전「아시아」를 삼키기 위해「마닐라」「홍콩」「사이공」「페낭」「싱가포르」를 치고 끝내 피 한 방울 안 흘리고「방콕」에 상륙했다. 태국은 일본과 동맹국이 되어 영·미에 선전포고를 했고「버마」를 치기 위한 전진기지가 되어 하루 아침에 일본군인·헌병들이 득실거리게 되었다.
일본인이 등장하자 태국의 화교가에는 갖가지 소문이 삽시간에 번지기 시작했다. 「마닐라」에서 1백 여명의 반일화교들이 성당 지하실에 갇혀 학살을 당했으며 일본군은「사이공」에서 항일 중국청년들을 잡아「시멘트」통 안에 넣고 태워 죽였다는 것이다. 또 이 같은 일본군의 총살은 부단이 계속되고 있어 비록 동맹국인 태국에서도 당장은 없더라도 전쟁만 끝나면 불원간 닥쳐올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이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처지가 기가 막혔다. 자신은 상해에서 일본군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이며 부인은 반일신문의 간부가 아닌가. 재빨리 사세를 판단한 이씨는 다음날로 보따리 하나를 싸 들고 아내와 함께 피난길에 나섰다. 우선 시골에 있는 부인의 친척들 집에 전전하기로 했다.
태국은 동남아의 복판이요, 철로·수로·육로가 사면팔방으로 인접국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길들을 지키느라 1㎞거리마다 23명의 일병이 깔려 있었다. 게다가 일병은 곳곳에서 태국주민 선무공작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씨는 어느 마을에서도 6개월 이상 장기체류를 할 수 없었다.

<종전 후 귀국 망설이다 포기>
무역업으로 벌었던 돈은 다 떨어지고 이씨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죽을 옷이 없어 풀대님을 매고 다녀야 했을 정도. 이렇게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가까스로 몸을 피해 다니기 2년여-.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태국을 집어삼키려던 일본은 그 자리에서 무장해제를 당했고 이씨는「방콕」으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새 출발을 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다. 조국이 해방되었으니 한사코 태국에서만 머물러서도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이미 45. 뿐만 아니라 피난중의 고생 때문에 건강마저 해쳐 몸까지 시름시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운이 빠져 3백 보를 걸을 수 없더니 나중엔 왼팔을 들 수가 없게 되었고 뇌신경이 이따금 뛸 때마다 눈에 불꽃이 번쩍거렸다. 이씨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의 부인도 병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부인은 남들이「에어컨디션」을 켜 놓고 있을 밤9시만 되면 추워서 담요를 두 겹으로 덮고도 벌벌 떨었으며 뺨의 혈색도 점점 변해갔다. 두 사람이 모두 없는 돈을 통틀어 양의·한의를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으나 허사였다.
절망에 빠진 이씨는 마지막으로 한국에 있는 가형이 한의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러나 그는 형님의 생사여부와 주소를 알 수 없었다. 이씨는 다짜고짜 서울종로 경찰서장 앞으로 편지를 써 형님을 찾아 달라고 호소했다. 2주일만에 회답이 왔다. 답장의 주인은 바로 형님이었다. 이씨의 편지를 받은 종로경찰서장이 이 사실을 신문에 보도, 개성에 살고 있던 가형을 찾아 준 것이다.

<목재 수출회사 설립…사업확장>
실로 오랜만에 서면으로 대하는 형제간의 해후였지만 이씨는 다른 것을 다 제쳐놓고 가형에게 우선 자기와 부인의 병세를 소상히 설명하고 처방전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에 대한 약방문이 형으로부터 왔다. 가형의 지시대로 약을 지어 이씨 부부는 3백 첩을 달여 먹었다. 그랬더니 두 사람의 병은 기적같이 없어지고 부인이 결혼 13년만에 처음으로 임신을 했다. 그건 바로 형의 마술이었다. 부인은 그 이후 연년생으로 1남3녀를 낳았다.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자 그는 다시 자신을 갖고 사업에 임할 수 있었다. 그는 목재 수출회사의 창립을 비록, 사업을 확장했다. 기계류·정미용 부속품에서 목재수출에 이르기까지 거의 손을 대지 않은 것이 없었고 사업도 상당히 번창했다.
우선 그는 서울의 형님에게 2만「달러」를 송금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만족할 만큼의 재산이 모이면 귀국하려는 생각도 가졌다. 그러나 부푼 꿈에 젖어 있는 그에게 고국은 또 한번 실망을 안겨 주었다. 6·25동란이 터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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