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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혔던 30년「서신의 길」트이자|공산전역서 잇단 새해안부|중공·사할린교포 171가구에 본사서 보낸 편지에 첫 회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중앙일보사는 소련·중공·동구 공산국가 등과 자유로운 서신교환의 길이 트인 이래 작년 연말, 해방 후 30년 동안「사할린」과 중공 등지에 억류중인 한국인 1천5백36가구의 명단과 주소를 입수, 이 가운데「사할린」교포 1백30가구와 중공 내 교포41가구 등에 새해 인사와 함께 고국의 소식을 항공우편으로 발송했다. 이 가운데 중공의 내몽고와 상해에서 조국내의 가족을 찾아달라는 답장이 잇달아 왔으나「사할린」교포로부터는 회신을 얻지 못했다.
서울 국제 우체국을 통해 발송된 문안편지에서『중앙일보사는 해외에 계시는 선생님과 가족·친지의 재회를 기대하며 혹은 소식을 나누는 일에 도움이 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고있다. 그곳 생활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신 사연이나 사진, 가족·친지의 주소를 적어 보내주면 나라안에 소식을 전하겠다』 고 약속하고 자유가 없는 공산치하에서의 생활을 위로했다.
이 가운데 제일먼저 답장을 보내온 이는 상해시 홍구구 형가교 남노253의24 강선희씨 (54·여) .
상해우체국 소인이 찍힌 채 서울에 배달된 항공편지에서 강씨는 『천만 뜻밖에 편집국장께서 보내주신 따뜻한 혜서를 배독하오니 너무나 감격하여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소녀는 일제시 부득이한 사정으로 정든 고향과 따뜻한 부모 곁을 떠나와 꿈결같은 30여년이 흘렀습니다. 두견새 우는 고향산천과 부모형제들이 그리운 생각에 밤마다 꿈속에서 향토를 보고 지내왔습니다』고 눈물 어린 사연을 적고 경북 대구시 비산동(번지불명)에 살고 있는 어머니 임윤악씨(70)와 남동생 용부·봉수·학수, 여동생 선옥·미선·금선씨 등의 소식을 알려달라고 호소했다.
본사는 곧 강씨 가족이 대구시 서구 내당동2가1017 에서 살고있음을 확인, 소식을 다시 전해주고 가족사진을 강씨에게 발송했다.
39년만에 딸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니 임씨는『살아 생전에 소식을 듣지 못할 줄 알았는데…』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강씨는 39년 전인 1936년15세 되던 해 찌든 가난 속에 입이나마 덜기 위해 중국사람에게 10년 계약으로 시집보낸 뒤 1944년 광목1필과 당시 현금 30원을 부쳐온 것을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는 것.
강씨의 아버지 강만세씨는 딸이 팔려간 2년 뒤에『자식을 넘겨주고 어떻게 눈을 감겠느냐』는 유언을 남기고 별세했다.
현재 강씨의 동생 봉수씨(48)와 학수씨(36)는 대구서문시장에서 청과물상점(창령상회) 으로 여유 있게 살고있다.
또 내몽고집이철궁한탑납 공정대 박진옥씨가 보낸 편지는 지난 연말 서울에 도착했다. 박씨도 『그립고 가고싶은 조국에 신의 은덕이 내려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부모형제·친척들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부모형제들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맴돌며 안타까운 눈물뿐』이라고 한글로 또박또박 적어왔다. 박씨는 동생 박동렬씨와 이모부 양궁섭씨에게 편지를 했으나 아직 소식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박씨는 공정대에 함께 있는 조진서씨(50)가 형 조경서씨(54)를 찾고있다는 사연도 전해왔다. 조씨 형제는 어릴 때 중국심양 서탑에서 살았고 중국 산서성태원에서도 살다가 해방 후 형만 한국에 돌아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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