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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에 선제 당한「세력」|조상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이날의 바둑은 치훈이나「사까다」의 특징이 잘 나타난 바둑이었다. 예상대로 치훈은 흑1,3의 2연성에서 흑13으로 3연성포석을 폈고「사까다」는 역시「3」다음 외목으로 백12까지 그가 전성기때 구사하던 전법을 폈다. 백4 외목은 미리 연구해 놓은 듯「노타임」.
세력과 실리로 팽팽이 맞서온 바둑은 흑55로 한점을 때린 수와 연이은 57이의 문수가 돼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이때 「사까다」의백60이 급소여서 백 한점이 쉽게 도망했고 흑은 집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치훈은 국후 흑55를 몹시 후회했다. 지금까지 두텁던 흑이 한발 늦어졌기 때문이다. 흑57도 이러한「쇼크」로『아차…』 하는 동안에 연달아 실수한 모양이다 이 수는 61에 두었어야했다.
제1, 2국에서 두번씩 대마를 잡힌「사까다」는 이날은 유감없이 수습의 실력을 발휘했다. 이후에도 중앙공격이 승부였지만 흑105,107등 최후의 공격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역시 무리한 공격이었고 결국 치훈은 대마를 놓치고 말았다. 치훈은 무리긴 해도 그렇게 싸우지 않으면 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날 치훈의 패배는 기술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패배였다. 시합전날 치훈은 잠을 잘못 이뤄 나는 수면부족이 걱정이었다. 이판만 이기면 선수권자가 된다는 정신적 중압감에서 나온 결과였을 것이다.
그 반대로「사까다」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배수의 진을 친 그로서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날은 어쩌면 마지막 결판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대국 장엔 보통 때의 배 이상으로 보도진이 많았다.
이날「사까다」는 그런 것도 이제 초월한 듯, 아니면 체념한 듯 노장답게 바둑에만 전념했다. 발빠른 포석으로 약삭빠르게 실리를 얻어 치훈은 완전히「사까다」의「페이스」에 말려들고 말았다.
저녁식사시간이 되었을 때「사까다」는 얼굴을 찌푸리며 6∼7분간이나 일어나질 않았다. 바둑이 유리하면 보통 반대로 얼굴이 굳어지는「사까다」의 표정을 보고 나는 치훈의 고전을 알 수 있었다.
저녁에 장어덮밥을 먹은 다음 무리한 패싸움이 벌어졌다. 백이 102로 끊었을 때 흑이 106에 이으면 무사하긴 하지만 집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치훈이 최후의 몸부림을 부린 것이다.
하오 8시44분 결국 치훈은『없습니다』하고 패국을 선언했다. 늦게까지 검토가 끝난 다음 치훈은 나에게 『형! 미안해!』 하고 씩웃는 것이었다.
내가 그를 위로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가 나를 위로했다. 순간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이날 밤 치훈은 너무 늦어 일본기원「호텔」에서 묵었다. 그리고는 27일의 제4국을 위해 칼을 갈았다.
다음 대국은 치훈이 백 차례니까 당연히 백이 불리하다. 그러나 치훈에겐 오히려 정신적인 부담이 없어 잘 싸울 것이다. <16일밤 동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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