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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창의적 융합교육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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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강태진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초기 학문은 지금과 같이 분화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학문 분야에 정통해 수학·정치학·철학 등에 대한 심도 깊은 저서를 남겼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해부학이나 건축학 등에도 능통한 융합인재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 양반은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예술가·문학가였다. 세종 때 이순지는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었지만 조선의 독자적 역법(曆法)을 완성한 최고의 천문학자이기도 했다.

 19세기 이후 학문의 발달과 함께 서구 중심으로 지식이 분화되기 시작했다. 지식의 양이 방대해짐에 따라 세밀한 분야로 나누어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활용하게 돼 어느 정도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사회가 복잡해지고 국가 간 교류가 활발해지며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면서 칸막이식 학문 연구나 교육은 한계에 부딪혔다.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법과 경제, 기술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한 분야의 전문 지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20세기 말에 들어서 학문의 융합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21세기를 맞은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통섭과 융합이 트렌드가 되었다. 현대는 지식정보문명 발달과 함께 일반인도 손쉽게 지식을 공유할 수 있으며, 지식의 생성과 소멸 주기도 매우 짧아져 가치 있는 지식이 나날이 바뀌고 있다. 이 때문에 현대와 같은 복잡한 지식기반사회에서 지식의 가치는 지식 자체뿐만 아니라 지식을 자유롭고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기존 지식의 통섭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에도 있다.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융합이 요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융합은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지고 있다. 나노기술이나 정보통신기술·생명공학기술 등의 융합으로 새로운 기술이 창조되고 있다. 기술과 인문학이 만나 스마트폰 혁명을 일으키고 기술과 예술이 만나 ‘아바타’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었다. 법학과 경영학이 융합되면서 기업 경영에도 기획소송과 지식재산권 보호법에 대한 이해는 필수다.

 영국은 1920년대부터 세 가지 학문을 융합한 PPE(철학·정치학·경제학)와 EEM(공학·경제학·경영학) 과정을 시작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특히 PPE 과정을 거친 영국의 캐머런 총리, 호주의 애벗 총리 등은 융합교육의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 1980년대부터 확산된 STS(과학·기술·사회) 교육은 공학과 수학이 융합된 STEM 교육으로, 최근에는 여기에 예술이 결합된 STEAM 교육으로 발전하고 있다.

 융합은 다학문 간 융합뿐만 아니라 하나의 학문 안에서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의학계다. 전통적으로 내과와 외과·정형외과·신경과 등으로 나뉘어 전문의가 양성되었던 것을 심장·뇌·척추 등과 같이 인체별로 각 분야 전문의가 융합해 연구하고 치료하고 있다. 또한 1950년대까지만 해도 기초의학과 임상이 엄격하게 분리되었으나 이제는 연구 성과를 환자의 진료 현장과 연결해 서로를 보완하는 ‘중개연구’가 점차 강화돼 가고 있다.

 칙센트미하이는 『창의성의 즐거움』에서 창의성이 지능이나 선천적인 능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창의성은 다양한 학문·기술 간 융합교육을 통해 계발될 수 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지만 기존 것들의 융합은 새로운 탄생을 낳는다. 중세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은 예술가·철학자·과학자·상인 등의 공동 작업을 후원했는데 이들의 창조 역량이 융합돼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우리도 융합교육을 더욱 적극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계획해 그 성과를 기다리면 한국의 메디치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강태진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