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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머스」에 어린이와 "엄마"가 함께 읽는 동화|겨울을 이기는 나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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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해가 다 저물어가는 무렵입니다. 일년 중에서 가장 밤이 길다는 동짓날이 지나갔습니다. 금년에는 팥죽도 못 얻어 먹었지만 말입니다.
이제 며칠 안 있으면 새해가 됩니다. 어른들은 괜히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서성거리는 것 같습니다. 우울해 하고 서글퍼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 일년을 돌아보며 안타까와하고 후회하는 것 같습니다.
온순이네 집 어른들만 해도 그러합니다. 온순이는 아주 착한 어린이지만 어른들은 모두들 이상하게 분주합니다.
언제나 아침과 밤이면 시끌법석대기 마련입니다. 별일도 아닌데 신경질을 내고 말다툼을 벌입니다.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늘 그러합니다. 또 어른들은 통행금지시간이 가까와진 때에 술에 취해서 들어옵니다.
집안이 떠나갈듯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말다툼을 벌이는 때도 있습니다. 온순이는 착한 어린이기 때문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려고 하지만 이런 까닭에 그것이 제대로 되지가 않습니다. 이담에 어른이 되더라도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고 온순이는 생각합니다.
특히 새해가 얼마 있지 않아 찾아오는 올해 세밑을 당해서 온순이의 집안은 왕상그르르 시끄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대학에 다니는 외삼촌은 신문을 보면서 주먹을 불끈 쥐는가하면, 온순이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유식한 소리로 개탄을 합니다. 참, 온순이네 가족들이 어떻게 되는지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온순이네 집에는 식구들이 참 많습니다. 아버지는 전라남도 광주에 있는 직장에 전근을 가계시지만 작은 아버지, 고모, 외삼촌, 오빠, 언니, 동생, 그리고 그렇지, 할머니가 지난 가을까지 계셨는데 그만 돌아가시고 말아 지금은 안 계십니다.
이처럼 온순이집은 식구가 많습니다. 그래서 돈을 쓸 일도 많습니다. 돈을 벌어와야 할 사람도 많아야할텐데 사실 그렇지가 못합니다. 어머니가 짜증을 내는 일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온순이는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아, 정말이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어.』
『저 어린것들을 게대로 키울 수 있을지…. 세상일이 큰일이야.』
마주 앉았다 싶으면 어른들은 이런 식의 이야기밖에는 할 줄을 모릅니다. 온순이는 그래서 안타깝습니다. 정직하고 착하고 올바르게 살면 될텐데 어른들은 왜 그러는 것일까요. 할머니가 살아계실 적에는 그래도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온순이는 이따금씩 할머니 생각이 납니다. 할머니는 조그만 안마당에 여러 꽃과 나무를 정성스레 키우셨습니다. 온순이도 할머니를 따라 물을 주고 거름을 만들어 뿌렸습니다. 꽃과 나무들은 지난 봄, 여름, 가을을 통해 계속 안마당을 화려하게 장식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어서 이 추운 겨울이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겨울나무는 너무 불쌍합니다. 꽃들도 다 죽어 버렸습니다.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습니다. 눈이라도 한바탕 내릴 것 같지만 눈은 오지 않고 차가운 바람만 씽씽 불고 있습니다. 나뭇가지가 잉잉 울고 있습니다. 『겨울 나무는 슬퍼하고 있는 거야.』
온순이는 나무가 얼마나 추워할까 생각해 보노라니 제발 힘을 내라고 격려를 해주고 싶습니다. 요새 같아서는 온순이 자신의 처지가 저 겨울 나무와 다를 바 없다는 쓸쓸한 생각도 듭니다.
집안 어른들 중에서 온순이의 착하고 고운 마음을 이해 해주는 사람이 드물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할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면 나무들에게 볏짚 옷을 해 입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안 계시기 때문에 그 일을 해줄 사람도 없습니다.
외삼촌, 작은아버지에게 몇 번 부탁해 보았지만 그분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온순이는 마루로 나갔습니다. 마루에는 구공탄 난로를 피워 따뜻합니다. 선인장과 「샌시비리어」등 열대성 관엽식물들이 화분 속에서 초록색이파리를 싱싱하게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순이는 선인장과 「샌시비리어」를 경멸하고 싶습니다.
(너희들은 훈훈한 마루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 뽐내지만…. 저 바깥 마당의 모진 추위 속에서 싱싱하게 푸른 이파리를 두르고 있는 소나무가 더 훌륭하단다.)
온순이는 자기가 선인장이나 「샌시비리어」와 같다기보다는 추위를 물리치면서 늘 푸른 소나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사람도 소나무와 같은 용기가 있어야 이 세상을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을 참되게 살아가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을 온순이는 이미 짐작해서 알고 있습니다.
온순이는 마당으로 나섰습니다. 소나무, 사철나무가 푸른 잎을 두르고 의젓하게 서 있습니다. 무궁화, 장미는 이파리를 다 잃어버린 채 벌거숭이 몸뚱이로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개나리도 죽은 막대기처럼 꽂혀 있습니다.
『이봐 힘을 내.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아.』
온순이가 일일이 나무 곁으로 가서 쓰다듬으며 달래듯 말했습니다.
『아녜요. 봄은 멀어요….』
무궁화나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무궁화나무가 이런 말을 했는지 어떤지 그것은 분명하지 않지만, 온순이는 확실히 이런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그러자 여러 나무들, 꽃들, 풀들이 온순이에게 말을 해오는 것입니다. 온순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도 봄은 오는 거란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거야. 우리는 사람들처럼 참을성이 적은 것이 아니니까. 꾸준히 참으면 우리의 봄이 오는 거야. 다시 우리들의 세상이 와요.』
역시 나이가 가장 많은 소나무가 의젓한 말을 할 줄 압니다.
『그래 그래 우리들의 세상이 온단다. 비록 지금은 추위에 떨며 아파하고 있지만… 심술궂은 동장군(동장군)이 제 힘만 믿고 날뛰지만… 힘을 믿고 날뛰는 자는 제 힘에 겨워 물러나기 마련이고, 그러면 봄이 오는 거야.』
『난 밑둥치부터 얼어붙었어. 이봐 온순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줄은 나도 알아. 하지만 난 밑둥치부터 얼어붙었어. 새 봄을 맞이하기까지 겨울을 이겨낼 수 있도록 나에게 힘을 넣어줘.』
장미가 이렇게 말합니다, 온순이는 가슴이 아프고 자기의 잘못을 깨우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집 사람들은 정말 지독하지 무어야? 이 집 사람들은 저네들 잘났다고 으시대기만 할 뿐, 나쁜 사람들이야.』
『요사이 사람들은 다 그렇게 나빠졌단다. 과학과 문명을 뽐내면서 나빠졌어. 사람들은 자기네 세계를 <인간사회>라고 하는 모양인데, 요새 그 인간사회가 아주 타락해 있어서 더욱 나빠졌단다. 그래서 억지를 부리고 참나무를 밤나무라 우기고, 대추나무와 감나무를 구별할 줄도 모른단다.』
이렇게 나무들은 갑자기 온순이를 가운데 놓고 사람공격을 벌여오는 것입니다.
『나무들아 왜 그러니? 그렇지만 나 온순이는 너희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란다.』
『그야 너는 나쁘지 않지. 너는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니까….』
이렇게 말하는 나무가 있어 돌아보니 그는 개나리였습니다.
『고맙다, 개나리야…나를 믿어줘서 고마와.』
온순이는 개나리에게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너는 내 생명의 은인이거든. 너두 일년전의 일을 기억하겠지?』
『참 그렇구나, 너 개나리가 우리 집에 온 것이 오늘로 일년째로구나.』
온순이는 일년전 일을 회상했습니다. 일년전 오늘 그러니까 「크리스머스」날이었을니다. 외출을 했던 외삼촌이 조그만 「크리스머스·트리」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아니 그건 「크리스머스·트리」도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모양의 꺾어진 나뭇가지에 하얀 「페인트」칠을 하고 거기에 은박지, 금박지로 별을 달고 조그만 전등알을 달아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장사꾼들이 나무를 꺾어 「페인트」칠을 해서 팔아먹은 것입니다.
온순이는 그 「크리스머스·트리」를 물병에 꽂아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겨울이 지나 봄이 되자 이것이 웬 일입니까? 은박지, 금박지가 떨어져 나가고 「페인트」칠이 벗겨진 나뭇가지에서 움이 트더니 연약한 이파리가 솟는 것이 아닙니까? 개나리는 생명력이 워낙 왕성해서 뿌리 없는 가지라 해도 수분만 있으면 이파리를 돋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온순이는 그 개나리를 땅에 묻고 정성껏 물을 주어 키웠습니다. 개나리는 지난 봄, 여름, 가을을 통해 무럭무럭 잘 자라났던 것입니다. 이파리도 무성해졌고 그리해서 이 집의 건강한 나무식구가 된 것입니다.
『온순아, 나는 누구보다도 겨울이 오면 봄이 온다는 것을 믿고 있단다. 나는 잘 참고 견딜테니까 너도 무럭무럭 자라야해.』
『응, 개나리야, 이제 새해가 오고 곧 봄이 온단다. 너는 어떠한 추위라도 이겨낼거야.』
『아, 눈이 내린다….』
개나리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과연 눈이 펄펄 내리고 있습니다.
『온순아, 이번 겨울 나는 진짜로 「크리스머스·트리」가 될 모양이다.
작년에는 비참한 「크리스머스·트리」였지만… 네가 나를 장식해 주겠지?』
『아암, 하구 말구… 개나리야, 올 겨울 우리는 더욱 희망을 가지게 되었구나.』 온순이는 너무도 기뻐서 껑충껑충 뛰었습니다. 어느새 함박눈은 개나리를 하얗게 풍성한 눈으로 장식했습니다. 온순이는 정성껏 개나리를 「크리스머스·트리」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모든 나무들이 기뻐했습니다.
온순이네 가족들도 모두 기뻐했습니다. 이 겨울이 지나면 어느 해보다도 찬란한 봄철이 다가올 것이라고 모두들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착하고 정직하고 마음씨 고운 온순이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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