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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회 정기국회의 반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9월20일에 시작한 제90회 정기국회는 여당의 독주와 야당의 농성, 그리고 여야간의 집단난투를 거치면서 보기 드문 변칙운영을 계속하던 끝에 지난 17일에는 또다시 8개 의안을 1분만에 전격 통과시키고 그 막을 내렸다.
그간의 휴회와 폐회기간을 빼면 실질적으로는 겨우 20일동안만 회합한 것인데 그 사이에 87건을 처리하였으니 국민생활의 현재 및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칠 중요한 안건들이 그 얼마나 조잡하게 다루어졌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한달 1백만원에 가까운 엄청난 금액의 세비를 받는 국회의원들 가운데 과연 몇 사람이 그 의안들의 제목이나 바로 읽어본 일이 있었을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이렇게 따져보면 국회가 열려있어도 국회는 사실상 없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국회법에 규정된 모든 절차에 따라 의안을 처리하는 형식을 갖추었다고 강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사보고를 유인물로 대체하고, 아무런 제반토의도 없이 의사봉 소리만으로 통과시킨 법안의 내용을 누가 정확하게 알 수 있단 말인가. 태평로에 국회는 있되, 헌법상의 국회는 없다고 밖에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여든 야든 변명은 각각 있을 것이다. 야당이 하도 원칙적인 문제, 그 토의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들고 나오기 때문에 형식만이라도 갖춘 운영을 했다고 여당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논의는 해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더욱이 원내의석의 3분의 2선을 확보하고 있는 여당이 모든 안건을 날치기로 밖에는 처리할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태도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여당의 처사가 야당에 절망감을 주어 힘으로 대항하고 급기야는 의사당 밖으로 나가서 외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물론 야당도 반성해야 할 점은 없지 않다. 무조건 여당에 반대하고 극한적인 언변을 부르짖는 것으로는 국민의 자유나 권리, 또 더욱이 안정된 국민생활이 보장될 수는 없다. 승산 없는 극한투쟁은 처음부터 생각지 않는 것이 현명하며, 오히려 구체적인 작은 문제를 하나씩 이나마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국민이 많을 것이다.
여야의 이와 같은 과오는 국회의 위치와 기능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한데 그 원인의 일단이 있을 것이다. 국회는 본래 행정부와 대립적인 관계를 가지고 그들의 독주를 견제해야 할 기능을 가진 기관이다.
대의제도 하의 국회란 본래가 삼권을 함께 관장하기 위해 자의를 함부로 해오던 군왕을 견제하기 위해서 생긴 제도인 것이므로 어떤 이유로든지 행정부를 비판하고 감시하는 기능을 잃는다면 그 존재이유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여당 의원들도 「여당」에 속하는 동시에 「의원」이라는 신분을 가졌음을 자각하면 무조건 거수기 노릇을 하여 행정부의 국회출장소 역할을 감수하는데 급급하는 태도는 국회의원의 자책행동일 뿐이다.
이와 동시에 국회는 정부조직과 고립해서 존재할 수 없으며, 이른바 조화와 균형의 위치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도 재론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여당이 밉고 행정부가 밉더라도 국회의원으로서의 행동에는 한계가 있음을 야당 의원들은 명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개헌논의도, 법안심의도 이와 같은 테두리 안에서 있어야 할 것으로 안다.
시정의 불량배와도 다르고, 무지한 촌부와도 다른 것이 국회의원이다. 그 어렵고 미묘한 소임을 제대로 해나갈 지혜가 요청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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