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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배우 황정순씨 89세로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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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63년 개봉한 유현목 감독의 영화 ‘김약국의 딸들’에 한약방을 하는 김성수(김동원 분)의 아내 한실댁으로 출연한 황정순씨(왼쪽에서 둘째). 왼쪽부터 여배우 엄앵란, 황정순, 최지희, 강미애, 이민자가 연기하고 있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황정순

연극·영화·TV를 아우르며 큰 사랑을 받은 원로 배우 황정순씨가 17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89세.

 1925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난 고인은 15세였던 40년 동양극장 전속극단 청춘좌에서 연기를 시작했고, 이후 극단 신협을 중심으로 250여 편의 연극 무대에 섰다. 70대에 접어든 99년에도 ‘툇자 아저씨와 거목’에 특별출연했다.

영화는 ‘그대와 나’(1941)에 단역으로 데뷔해 강대진 감독의 ‘마부’(61), 유현목 감독의 ‘장마’(79) 등 370여 편에서 활약했다. ‘육체의 고백’(64)의 카리스마 넘치는 나이트클럽 마담, ‘민며느리’(65, 최은희 감독)의 악독한 시어머니 등 다채로운 캐릭터를 연기한 그는 김희갑과 부부로 출연한 ‘팔도강산’(67)을 통해 자애로운 어머니 이미지를 널리 알렸다. ‘팔도강산’은 노부부가 전국 각지에 사는 자녀를 만나러 유람여행을 다니는 이야기다. 당시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국책홍보영화임에도 큰 흥행성공을 거둬 ‘속 팔도강산’(68) ‘내일의 팔도강산’(71) ‘아름다운 팔도강산’(72) 등 시리즈가 이어지는 인기를 누렸고, TV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이후 TV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보통사람들’(82~84, KBS) 등 숱한 작품에 출연했다.

 그와 ‘혈맥’(63) ‘갯마을’(66) ‘산불’(67) 등 20여 편의 영화를 함께 찍은 김수용 감독은 “어떤 배역이든 걸음걸이·말투·표정 등 온전히 그 인물이 되기 위해 별의별 노력을 지독하게 한 배우”라면서 “전문 교육을 따로 받을 수 없던 시대에 연기를 몸으로 익히며 배우의 지적 세계를 넓혀왔다”고 회고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62)를 함께 찍은 임권택 감독은 “젊었을 때부터 어머니·할머니 역할을 주로 맡으며 우리들 가슴 속에 ‘한국영화의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새겼다”며 “한국영화계가 꼭 기억해야 할 큰별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김동호 문화융성위원장은 “거동이 불편하실 때도 부산국제영화제는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는 등 영화계 행사마다 영화 속 이미지처럼 인자하고 배려 많은 모습으로 후배들을 챙겼다”며 “해방 전부터 활동한 ‘한국영화의 어머니’이자 명실상부한 한국영화의 역사”라고 추모했다.

 별세 소식을 들은 네티즌들은 “우리 시대의 영원한 어머니로 살아오신 분” “흑백TV에서 김희갑씨와 연기한 기억이 생생하다” “어릴 적 드라마에서 너그러운 할머니 역할로 자주 나오셨는데 인상이 부드러웠다” “언젠가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하고 먼저 간 동료배우들의 이름을 불러 눈시울이 뜨거웠다” 등 세대별로 다양한 기억을 쏟아내며 고인을 추모했다.

 고인은 ‘사랑’(57)으로 제1회 한국평론가협회 최우수여우상, ‘혈맥’으로 대종상·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갯마을’ 등으로 대종상 여우조연상도 여러 차례 받았다. 92년 보관문화훈장, 2004년 대한민국예술원상, 2007년 여성영화인상 공로상을 받았다. 2006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남편 이영복씨와는 51년 결혼해 77년 사별했다.

 유족은 1남1녀. 한국영상자료원(원장 이병훈)은 오는 4월 그의 대표작을 무료로 상영하는 ‘황정순 추모 특별전’을 열 계획이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발인은 20일 오전 11시. 02-2258-5940.

이후남·지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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