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8)그 입지의 현장을 가다)|재미 실업인 김한조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62년 겨울의 어느날.
김씨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6시에 「워싱턴」시내의 집을 나섰다. 그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비서가 「코피」와 「도넛」을 갖고 들어왔다. 그는 원래 「코피」광이었다. 「코피」를 한 모금 마시고 「도넛」을 집어드는 순간 전기 「스탠드」가 흔들거리더니 비스듬히 쓰러졌다.
그가 의식을 회복한 것은 근처에 있는 「유진스·미모리얼」 병원이었다.

<회사명은 아들 이름으로>
심장은 정상. 혈액순환도 정상. 그런데 좌반신이 제대로 말을 안 듣는다. 그때부터 「워싱턴」일대의 이름난 병원의 순례가 시작되었다. 진단 결과는 「스트레스」로 인한 「노이로제」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심지어는 정신과 의사까지 찾게 되었다. 운전을 할 수가 없다. 차를 몰고 가노라면 갑자기 왼팔, 왼쪽 다리가 가벼운 기능 마비 현상을 일으키거나 현기증이 일어나 한번 출근길에 열번 이상을 쉬어야 한다.
부인은 만삭의 몸으로 차남 「보비」의 출산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부인이 운전을 배웠다. 출퇴근을 운전사가 달린 회사차로 했다.
부자유스러운 몸으로 출근을 계속했다. 의사는 여행을 자주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김씨는 여행 중에 누가 모략이라도 하여 자리를 뺏을까 봐 여행을 삼갔다. 같은 이유로 그는 매년 3개월간의 정기 휴가도 포기한 사람이다.
이렇게 병이 들고 부터 그는 비로소 인생을 철저히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가족에 대한 태산 같은 걱정은 그의 병을 악화시켰다. 내가 이대로 쓰러지면 가족들은 낯선 땅에서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사장이 자기를 파멸시키기 위해 고의로 높은 자리에 앉혀 일을 많이 시킨다고 의심할 정도의 심각한 「노이로제」환자가 되었다.
그는 정신력을 가다듬었다. 부인과 상의한 끝에 그 「죽음의 계곡」을 탈출하여 작은 규모라도 자영 업체를 갖기로 작정했다. 그에게는 그때 10만「달러」의 예금과 20만「달러」의 주식이 있었다. 그는 화장품에 착안했다. 그가 가장 자신을 가질 수 있는 분야였다. 공장장 「로이·슐링먼」이 당신하고 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면서 따라 나섰다. 발병한지 1년 뒤의 일이었다.
그는 「매플린·매캠브리지」 회사가 지닌 약점을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회사를 「패밀리·사이즈」의 작은 규모로 하여 그 대신 품질의 최고급화로 방침을 세웠다. 직원 5명, 자본금 30만「달러」로 「샴푸」 「로션」을 생산하는 「존·앤드·비·디」 회사를 발족시켰다. 그 때는 이미 3남「더글러스」까지 잇달아 태어났다. 회사 이름은 「존」 「보비」 「더글러스」의 삼형제 이름을 따서「존·앤드·비·디」로 지었다.

<첫해 매상이 20만「달러」>
가정에 충실한 그의 일면이 나타난다. 후에 외딸 미성이 태어났을 때 회사 이름을 다시 길게 고칠까 하다가 우선 「샴푸」하나에 미성이라는 이름을 달아 주는 걸로 그쳤다.
「존·앤드·비·디」 회사도 처음엔 별 수 없이 「프라이비트·레이블」로 출발했다. 「워싱턴」 지역의 연쇄 백화점 「몽고메리·워드」와 「시어스」에 화장품을 공급했다. 「샴푸」와 「로션」에는 「아티전·스프링」이라는 상표를 붙였다. 그 때 다른 회사의 「샴푸」한 병의 소매가격이 평균2「달러」인데 「존·앤드·비·디」회사 제품은 3「달러」에 팔렸다. 출고가격은 1「달러」80「센트」. 그 대신 포장과 품질에 신경을 썼다. 사원들은 밤낮으로 일을 했다. 첫 해의 매상은 20만「달러」. 자신이 생겼다. 차차 「프라이비트·레이블」을 줄이고 자체의 상표를 붙인 화장품의 수를 늘렸다.
그 무렵 김씨는 일생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했다. 회사 근처에 5「에이커」의 땅을 사서 겉보기에는 소박하지만 내부의 생활 공간은 상당히 넓은 집을 지었다. 그가 오늘날까지 그 집에서 살고 있는 것은 미국 같은 기동성 있는 사회에서는 특이한 일이지만 하나에 집착하는 그의 끈질긴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대종 상품은 인조 눈썹>
그는 상품 선전·판매를 위하여 사무실을 뛰쳐나와 여행을 다녔다. 그러자 병이 눈에 띄게 차도를 보였다. 부인은 때는 왔다고 판단했다. 어느 날 우체국에 볼일이 생겼다. 부인은 남편에게 운전사 없이 혼자 차를 몰고 갔다 오라고 말했다.
땀이 흥건한 채 집에 돌아온 남편은 「워싱턴·볼티모」 고속도로 위에서 열 번을 쉬었다고 말했다. 부인은 혼자 입술을 깨물면서 다음날 다시 같은 우체국에 다녀오라고 일렀다. 오늘은 다섯번을 쉬었다. 부인은 다음날 다시 남편을 우체국에 보냈다. 그날은 한번 쉬고 다녀왔다.
김씨는 이렇게 해서 「노이로제」를 극복하고 심신의 균형을 회복했다. 다시 운전대를 잡을 자신이 생겼다. 그가 독자적으로 화장품 회사를 세울 때 그의 사업의 앞날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양인이 화장품 업으로 성공할 수가 있을 것이며, 그것도 정치 도시인 「워싱턴」에서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고 모두들 말했다. 그러나 김씨는 이 두개의 신화를 타파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동양인이라는 사실을 역용하고 「워싱턴」이 정치 도시이기 때문에 정가·외교가에는 항상 「파티」의 불야성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64년 드디어 「존·앤드·비·디」 회사의 대종 상품이 되는 눈썹을 「데뷔」시켰다.
한국에서 2백개의 눈썹을 수입했다. 그것을 부인이 미국 여성들의 취향에 맞을 만한 길이로 다듬어 「벨비트·아이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당시만해도 일반 여성들은 인조 눈썹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 연예인들이 주로 사용했다.
처음 2백개를 「워싱턴」의 고급 백화점 「가핑겔」에 공급하고는 신문·「텔리비젼」으로 광고를 했다. 눈썹 2백개가 며칠 사이에 매진되었다. 원가 90「센트」하는 눈썹을 3「달러」씩 받는데도 물건이 모자랐다. 「가핑겔」 「로드·앤드·테일러」 「새크스」 같은 고급 백화점을 이용하는 상류 사회의 부인들은 가격은 문제삼지 않았다. 처음 6개월에 백만쌍의 눈썹이 팔렸다.
이 같은 최초의 성공을 발판으로 고급 백화점마다 「카운터」를 열었다. 백화점에 새로 「카운터」를 열 때마다 「세일즈 걸」들을 훈련시키는 강좌를 마련하여 부인 고객의 얼굴 모습과 취향에 따라 눈썹을 「테이퍼링」(다듬는 일)하는 것을 지도했다. 트기처럼 작은 얼굴을 가진 김 여사는 「모델」형의 미모와 「스타일」을 타고났다.

<영국 일류 백화점까지 진출>
신문과 「텔리비젼」에서는 「벨비트·아이스」를 붙인 그녀를 계속 기사로 다루기 시작했다. 배후에서는 김씨가 지휘하는·선전「팀」이 조종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회사를 설립한지 약 5년만에 김씨 부부의 이야기는 미국 전국의 3백개의 신문에 기사로 소개되고 TV「쇼」에 1백75회나 출연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는 동안 「존·앤드·비·디」회사의 화장품과 눈썹을 파는「카운터」는 전국의 6백개의 백화점과 영국의 「해로드」백화점으로 늘어났다.
5년만에 사업은 완전히 궤도에 올라 연간 매상고가 몇십만「달러」대에서 몇백만「달러」대로 껑충 뛰었다. 한국의 눈썹이 본격적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인 「맥스팩터」가 주로 배우들에게 눈썹을 공급하는 정도였다. 인조 눈썹의 대중화는 「존·앤드·비·디」의 공로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과장은 아니라고 김씨는 말한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