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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일을 개척하는 선구자가 되라(아현 감리교회 김지길 목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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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신약성경 「마태」복음 3장1절 이하를 보면 세례 「요한」에 대한 얘기가 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여인이 낳은 자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이가 없다고 하신 것처럼 시대를 앞서간 위인이요, 선구자였다. 세례 「요한」은 4백년간이나 예언자의 정의의 소리가 「이스라엘」땅에 끊어진 때 「요단」강 양편에 있는 거친 들판에서 한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오는, 즉 율법과 예언의 시대가 가고 복음과 신약의 시대가 오는 분수령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노라』고 외쳤던 것이다.
「요한」은 앞을 밝히는 빛이거나 죄를 책망하는 소리만이 아니라 신을 향해 가리키고 서 있는 이정표이기도 했다.
그가 민중들에게 내보이고 싶었던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고 만인이 기다리는 「메시아」였다.
「요한」은 대중의 눈길을 자기의 지혜나 자기의 인기에 집중시킨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에게만 두었던 것이다. 「요한」은 절박한 사람들에게 의를 환기시켜 주고 적극적으로 신에 대한 도덕적인 표준을 세워 주며 그 들이 해야 할 일들을 제시해 주는데 과감하고 성실했던 것이다.
성실이란 인생의 「알파」(처음)요, 「오메가」(마지막)다. 우리는 사리에 참된 것을 진리라고 일컫고 심정이나 행동의 참된 것을 성실이라고 일컫는 줄로 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행함으로써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진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모든 사람은 성실한 행함을 위하여 구원받았다는 것도 역시 진리인 것이다. 여기에 행함이란 하나의 도덕이나 윤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전적으로 외형적인 것이나 전적으로 습관적인 행동이 되기 쉬운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윤리는 하나의 의지적인 윤리인 동시에 행동의 윤리인 것이다.
올바른 의지에서 올바른 행동, 이것이 성실이다. 도덕은 인간에게 악한 일을 행하지 말라고 하지만 신앙은 그러한 악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조차도 품지 말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야말로 정신혁명의 기수요, 생활혁명의 기수요, 도덕혁명의 기수로서 자기 스스로가 먼저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 사회상은 무자비했다. 그래서 옷 두벌 있는 사람은 한 벌 나누어주고 먹을 것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세리들에게는 정한 세 이외에는 받아 가지 말라고 했다. 실로 무법한 세계요, 불공평한 사회였다. 군인들에게는 난폭하지 말라고 했다. 사실이 없는 것을 뒤집어씌우지 말라는 것이다.
한 사회의 주체가 되는 개인의 건전한 인격확립을 위해서는 자기혁신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 사회는 바르게 전개되고 사회를 변혁하는 윤리가 확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새 일을 개척하는 선구자는 자기혁신을 위해서 인색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당시 노동자의 의복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어 가며 의식주를 완전히 혁명했던 것이다. 현대인의 의복은 길이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그리고 수백 만원씩 주고라도 보석반지를 손에 끼려고 한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바로 살려는 사람에게는 가난이 오고 고독이 오고 마지막에는 권력을 잡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생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문명생활에 대한 통일도 훈련도 없는 잡다한 민중을 지도해서 신생국가를 이룩하려고 했던 「모세」도 맨주먹으로 수십만 무장군대를 대항해서 싸우면서도 한번도 후퇴하지 아니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그 당시 종교가 형식주의화 되어 열매가 없고 위선적인 것을 책망했다. 열매 맺지 않은 나무는 찍어 불에 던진다고 했다. 또 관념적인 종교나 둔각적인 종교를 힐난했다.
생각이 둔하고 감각이 없고 생명력이 없는 종교였기에 도끼는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찍혀 불에 던짐을 받지 않도록 회개하여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다.
세례 「요한」은 인간혁명과 신의 나라 도래를 하나로 보고 타개는 상실한 인간회복이요, 이것이 바로 천국실현의 복귀원리라고 제창한 것이다. 「요한」은 「예수」를 주로 믿고 불로 세례를 주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며 심판의 주로 믿은 것이다.
자기는 인간을 혁명하고 새 세계 도래를 외치지만 그것을 이루는 능력은 「그리스도·예수」에게 있다고 믿었다. 그는 흥해야 되고 나는 쇠해야 된다는 것은 모든 영광은 신께 돌리는 것이었다. 새 일을 개척하는 선구자는 상황판단을 정확히 하고 그 처리는 견인성 있으면서도 아랑 있게 할 때에 보다 좋은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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