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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5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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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아아. 내 눈깔에 점안은
누가 해주나!

-김성동

쌈짓돈으로 이루어졌고 매미 껍질처럼 빈약한 문인들의 속살을 다 파먹고서야 끝이 났다. 문예지는 창간호가 종간호인 것도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토록 힘든 문예지는 왜 만드는가. 첫째가 글농사를 지을 땅을 주어 좋은 곡식(문학)을 거두자는 것이요,둘째가 역량 있는 신인을 뽑아 복돋는 일이다.

나는 '한국문학'의 새 편집방향을 소설 키우기로 잡았다. 소설 문단이 2백자 원고지 70장 안팎의 단편에 매달리는 것은 답답한 일이었다. 매월 권두에 중편을 싣기로 했다.

첫 중편이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였다. 제2회 이상문학상을 탈 만큼 역작이였다. 이 작업은 내가 '한국문학'을 놓을 때까지 밀고 나갔고,오늘의 작가들이 긴 소설을 낳는 데 징검다리가 됐다고 나는 속셈을 하고 있다.

권두 중편과 함께 1백만원 고료 신인상을 모집했다. 중편소설과 시 두개 부문에 내건 상금 1백만원은 30년 전 쯤의 글값으로는 적지 않은 것이었다.

78년 제2회 중편소설 응모작품을 읽고 있던 문학평론가 홍기삼에게서 전화가 왔다.'아무래도 대어가 걸려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김성동의 '만다라'가 그 대어였다. 유주현.최인훈.홍기삼 세 심사위원들은 다같이 높은 점수를 주었고,'만다라'와 함께 신인 김성동은 문단의 새 얼굴이 되었다.

소설'만다라'는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병속의 새'라는 화두가 젊은 파계승의 행각 속에서 날개를 파닥거렸다. 중편으로는 아깝다는 찬사에 힘입어 김성동은 장편으로 개작에 들어갔고 79년 베스트셀러로 뛰어오른 '만다라'덕분에'한국문학'은 잠시 운영에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김성동은 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세살 때 6.25를 겪는다. 아버지와 삼촌은 좌익, 외삼촌은 우익으로 처형돼 친가와 외가가 일시에 몰락했다.다섯살 때부터 조부에게 한문을 배워 '맹자'까지 읽었다니 글공부는 여기서 싹을 틔운 것이리라.

초등학교를 다니던 열한살 때 원고지 50장 소설을 썼다니 옛날 같으면 임금이 상을 내릴 신동이 아닌가. 서라벌고등학교 3학년을 자퇴하고 열 아홉에 입산,지효(智曉)선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선방을 돌며 참선을 했으나'병속의 새'를 꺼내지 못하고 객승으로 떠돈다.

75년에는 '주간종교'의 종교소설 모집에 '목탁조'가 당선했는데 불교계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승적을 잃는다. 입단대회에 나갈 만큼 바둑을 잘 두어 '바둑'잡지 기자 등을 하면서 '만다라'를 써 낸 것이다.

'만다라'는 80년 광주항쟁의 불길 속에서도 잘 팔리고 있었다. 영화사들이 달려들었다. 판권소유는 '한국문학'의 것이었지만 나는 좋은 값에 팔아 김성동에게 줄 작정이었다. 경쟁을 물리치고 나는 가장 신용도가 높다는 화천공사에 주기로 했다.

충무로 일식집에서 임권택.정일성.이태원 세 사람을 만나 계약을 했다. 임권택 트리오는 영화'만다라'를 시작으로 많은 상을 휩쓸더니 지난해에는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까지 움켜쥐었다. 김성동은 아직도 '병속의 새'를 못 꺼냈는지 산에 틀어 박혀 있다.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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