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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그의 ‘골드베르크’엔 엄격과 자유 공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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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호 27면

중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지휘자, 작곡가인 왕샤오한(1980~ ). [www.xiaohanwang.com]

고백하자면 나는 부럽다는 감정을 잘 몰랐다. 혹시 부러울 게 없어서 그런 것 아니냐고 한다면 물론 절대로 아니다. 그저 지극히 무경쟁적인 천성을 타고났을 뿐. 유치원 간식 시간에 모든 아이들이 자기 것을 먼저 해치우고 친구들의 것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대체 어떤 심리냐는 질문을 던져 선생님을 당황하게 했고, 초등학교 시험 때 “이것만 맞았으면 네가 1등인데 아쉽지도 않니?” 하는 엄마에게 “(1등 한) 그 아이는 원래 공부 무지 잘하는 애야~ 나랑은 달라!”라며 도리어 엄마에게 무안을 주었으며, 콩쿠르에서 나보다 총점이 1점 낮게 발표된 친구와 공동 1등이 되었는데도 친한 친구와 상을 나누었다며 오히려 좋아해서 주변 사람들을 김빠지게 만들었던 나였다.

내가 만난 천재 ③ 왕샤오한(王笑寒)

그런데 이런 나에게도 태어나서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으로, 저 소리가 내 것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만들었던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왕샤오한. 피아니스트로서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2006년 10월, 하노버에 도착하자마자 한 일이 바로 아리에 바르디 선생님,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모차르트의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리허설이었다.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가 처음 본 그는 내 예상과는 심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자기 제자 중 단연 최고로 음악적 지식과 깊이가 어마어마하다는 선생님의 묘사에 따라 나 혼자 그려온 얌전한 학자 같은 모습은 웬걸, 목소리 크고 성깔 있을 것 같은 중국 청년이 아닌가. 그의 음악은 더욱 예상 밖이었다. ‘깊이’라는 단어를 맨 먼저 꺼내기에는 조금 무색할 정도로 그의 손가락은 가볍고 미끈했다. 기교파는 아니었지만 음악적이면서도 매우 정확한 손가락은 가장 먼저 귀에 꽂힐 정도로 뛰어났다. 그의 첫 이미지는 바로, 흔하디흔한 중국인인 셈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와 친해지는 사이 그 실체를 점점 알게 되긴 했지만.

과연 아는 게 많기는 했다. 자유자재로 각 나라 정치 현안, 중국 고전 예술, 노벨문학상 후보들에 대한 품평을 하면 옆에서 ‘난 베스트셀러 따위는 안 읽어’ 하며 애써 넘기려 해도 왠지 신경에 거슬렸다. 그래도 이런 거야 내가 더 어리니 앞으로 메워 나갈 시간이 있다고 자위했는데 다만 음악에 대해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또래에 비해서는 월등히 많이 듣는 편이었는데 모르는 슈베르트 가곡이 없고 브람스 교향곡은 외워서도 지휘할 정도인 그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늘 듣던 ‘마태 수난곡’ 대신 ‘요한 수난곡’을, 모차르트의 ‘레퀴엠’ 대신 케루비니의 ‘레퀴엠’을, 베토벤 ‘7번 교향곡’ 대신 ‘8번 교향곡’ 등 크게 관심없던 음악까지 샅샅이 뒤져 듣기 시작했고 슈베르트 가곡은 가사까지 외웠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진짜 불이 지펴진 날은 바로 그의 연주를 직접 들은 그날이었다.

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이 곡의 광이던 내가 드디어 찾은 실로 최고의 연주였다. 엄격함과 자유가 공존하는 구성을 한 번에 꿰뚫는 광범위한 시각과 자칫 현학적인 유희로 치우칠 수 있는 음악에 불어넣은 생명력은 그 어떤 대가들의 연주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루푸보다 더 뜨겁고 브렌델보다는 더 감정적이고 코르토처럼 말하는 듯한 소리를 내지만 그보다는 더 정제된, 나를 특히나 압도한 건 소리의 퀄리티였다. 최대로 부풀린 풍선처럼 공기가 가득한데 속은 꽉 차서 밀도가 높은 가운데에도 끈적이지 않고, 마시멜로처럼 푹신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또 기분 좋게 무겁기도 하고. 무엇보다 한 음 한 음에 영혼이 가득 찬 그의 소리는 충격 그 자체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의 나이가 되는 6년 후, 나는 저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문제는 그걸 전혀 모르는 본인이었다. 그에게 음악은 끝없이 엮인 탐색 같은 것이었다. 작곡가가 의도한 바, 그로 인해 추구되어야 하는 소리, 그로써 구현되어야 하는 철학…. 누군가의 눈에는 쓸데없다 여겨질 정도로 그는 본질만을 추구했다. 그에게 연주자란 그저 매개체에 불과했다. 자신이 어떻게 비춰지는지, 어떤 감동을 주는지, 즉 관객의 어떤 욕구에 부응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그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당연히 자신을 어떻게 포장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눈부신 미모도, 자극적인 무대 매너도, 눈물을 짜낼 스토리도 없는 데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중국인인 그가 아무리 독일 음악을 독일 사람보다 몇 만 배 더 잘 연주한들, 그가 팔리기 어려운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혹할 정도로 그의 인생은 영 풀릴 줄을 몰랐다. 콩쿠르에서의 연이은 실패와 기획사들의 거절에 지친 그는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2009년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그 후 모 학교의 교수임용에서는 더 높은 점수를 기록하고도 다른 이에게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그는 로비도 젬병 중에 젬병이다.

한때는 그의 실패담이 마치 내 일인 양 좌절감을 느끼곤 했다. 저 정도의 재능이 사장되는 곳이라면 성공도 무의미할 것 같다는 생각에.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른 지금은 좀 다르다. 그의 인생이 끝나지 않았듯 그의 음악도 끝나지 않았는데, 언젠가는 그의 본질이 세상을 감동시키는 날이 오지 않을까? 희망적으로 생각해보려 한다. 사실 그런 생각이라도 해야 나도 옆에서 음악 할 힘이 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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