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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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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우리네 조상에게는 독창력도 많았다. 한글을 만들어 내고 첨성대를 세운 것은 뛰어난 독창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뛰어난 사상가도 많았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예술가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독창적인 종교 사상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왜 그럴까? 만만치 않은 의문이다. 사람들은 사회가 어지러워질 땐 흔히 종교로 돌아간다. 그리고 묵은 가치관이 허물어질 때 새로운 종교도 나온다. 불교가 그렇고, 기독교가 그렇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사상의 자유로운 토양이 그토록이나 메말라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선생 1백50주년을 맞는다. 그가 동학을 새로 엮어 낸 것은 전혀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그가 처음으로 동학운동을 일으킨 1890년대는 안팎으로 걷잡을 수 없이 어지러운 때였다.
완전히 말기적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나라 안의 정치는 부정과 부패로만 쏠리고 있었다. 인심도 흉흉했다.
군부군 신부신 부부부 자부자…이렇게 최제우는 몽중노소문답가에서 말했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한…한마디로 난세였다.
여기에 또 외세의 침략이 물밀듯이 닥쳐왔다. 정감록이 유행하고 계룡산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유도·불도 수천년에 운이 역시 다 했다』고 느낀 최제우가 서학과는 대립되는 뜻에서 동학을 일으키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도 있다.
물론 그는 백지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의 인내천의 사상의 밑바닥에서는 천즉인 인즉천이라고 한 의소의 사상이 깔려 있다.
그의 지기일원론도 율곡의 주기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만약에 실학이 불러일으킨 새로운 바람이 없었다면 과연 최제우도 그처럼 대담한 사상을 펴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세상 만사 어느 것이나 연속적인 것이다. 아무 전통 없이는 어떠한 새로운 것도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이래서 전통이란 소중한 것이다. 최제우의 사상은 사실은 그리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의 가치도 독창성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의 사상의 기둥은「수심정기」에 있었다.
나의 옳은 마음을 지키고 내 몸을 이루고 있는 기를 바르게 하자는 뜻이다. 이것은 그의 이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했던 말들과 별로 다름이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최제우를 우리 역사상 다시없이 소중한 인물로 아끼게 된다. 그것은 뭣보다도 사상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의 의연한 자세가 우리를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41세에 처형되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굽히지 않았다. 이러한 순도의 전통도 우리에게는 살아 있다. 동시에 송병준의 배신도 쓰라린 유산처럼 남아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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