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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침한 골목길에 벽화 수놓으니 아이들 웃고 떠드는 소리 넘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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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9일 미나릿길을 찾은 이상표·상민씨 가족들은 벽화 골목길을 도는 1시간 동안 쉬지 않고 웃고 떠들며 즐거워했다. 프리랜서 진수학

천안시 중앙동에 있는 미나릿길이 갈수록 인기를 더하고 있다. 전국에서 온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주말에는 관광객이 500명을 넘는다. 몇 년 전부터 마을 주민들과 인근 대학 학생들이 힘을 합쳐 낡은 담장들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좁은 골목길에 불과했던 미나릿길이 관광명소로 탈바꿈했다. 살펴보면 지역 곳곳에 특색 있는 벽화거리가 숨어있다.

미나릿길은 원성천변에 가득했던 미나리꽝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미나리꽝은 다 없어졌지만 마치 시간이 멈춰진 것처럼 낡은 담장과 좁은 골목길은 옛 모습 그대로다.

 중심상권이 신부동 터미널과 두정동 등지로 빠르게 옮겨가면서 미나릿길은 천안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 됐다. 언제부턴가 이곳에 20여 명의 미술·디자인 전공 학생이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은 이들의 정성이 고마워 간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1년여 만에 완성된 미나릿길 골목에는 220여 점의 벽화와 부조가 생겼다. 첫 번째 골목길 벽면에는 열두 띠(12간지) 이야기, 겨울풍경과 빙하, 북극곰·펭귄·사슴 등이 그려져 있다.

 이어지는 두 번째 골목에는 어린이 테마거리, 자연환경과 풍속화, 호랑이·팬더·거북이·독수리·공룡, 천사의 날개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이 관람객을 맞는다. 세 번째와 네 번째 골목에는 아름다운 봄, 여름 풍경과 만화캐릭터·미나리, 천안의 옛 모습과 현재가 있다.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자물쇠를 걸 수 있는 커다란 하트 철망도 미나릿길의 볼거리다. 옛 추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미나릿길을 걷다 보면 1시간 정도 걸린다. 인근에 중앙시장과 천일시장 등 전통시장이 있어 또 다른 볼거리와 먹거리를 선사한다.

 “니들 방구차(소독차) 알아? 아빠 어렸을 때 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방구차 쫓아 다니다 할머니에게 매맞아 울고 했는데 … 하하하”

 지난 9일 가족 아홉 명과 함께 미나릿길을 찾은 이상표(45)·상민(37) 형제는 “어릴 적 골목길에서 뛰놀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형 상표씨는 “어린 시절 내 모습을 쏙 빼닮은 아이들과 함께 골목길을 걷다 보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너털웃음을 짓는 아빠를 따라 웃는 아이들은, 방구차 소독연기를 따라 달음질하는 벽화 속 아이들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닮았다. 시간도 머물다 간다는 오래된 골목길은 마치 이야기 보따리처럼 끊임없는 추억을 풀어내며 이씨 가족을 웃게 만든다.

천안시 신부동 벽화거리는 미술 전공 대학생과 주민들이 함께 작업에 참여했다.

 골목에서 떠드는 아이들 소리에 짜증이 날만도 하지만 주민들은 오히려 “아이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반갑다”고 좋아한다. 골목길에서 만난 한 주민은 “3, 40년 전만해도 하루 종일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모여 노느라 웃고 떠드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언제부턴가 아이들이 하나 둘씩 줄면서 어둡고 음침한 마을이 됐다”고 회상했다.

 그는 “어느 날 젊은 대학생들이 찾아와 골목 담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동네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며 “골목에서 아이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허윤갑 중앙동사무소 담당자는 “벽화를 그리는 동안 폭염에 장마까지 겹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며 “미나릿길 벽화마을이 시티투어 정규코스에 포함될 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고 자랑했다.

주변에 터미널과 백화점이 있어 젊은이들이 몰리는 신부동 먹자골목 벽화도 인기다. 2011년 말 조성된 신부동 벽화거리 역시 인근의 대학생들과 상인회가 협력해 꾸몄다.

 옛날 신부동 먹자골목은 각종 전단지와 음식물쓰레기로 바닥과 벽이 얼룩져 번화가의 양면성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었다. 신부동 상인회는 이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그린파이존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80여 곳의 벽화 대상지를 선정하고 두 차례에 걸친 공청회를 통해 개성이 각각 다른 학생들의 생각을 끄집어 내 신부동 거리에 적합한 벽화도안을 만들었다.

 지역공동체일자리사업 참여자와 함께 지역 대학에 미술전공자나 동아리 활동을 하는 학생 40여 명이 참여해 젊은이의 눈높이에 맞는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바쁜 학업 일정을 쪼개 틈나는 대로 학생들이 벽화를 그려나가자 상인들도 하나 둘 서툰 솜씨를 보태기 시작했다. 얼룩져 흉하던 회색 벽에 ‘세계 속의 신부동’ ‘바이올린 켜는 사람’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응용한 작품 등이 새겨졌다.

 개성 넘치는 벽화가 하나하나 완성돼 가면서 상가거리의 분위기도 깨끗하게 바뀌고 상권이 활성화돼 상인들의 결속력도 단단해졌다. 누구보다 이곳을 찾는 젊은이들의 반응이 폭발적이다. 저마다 벽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소셜미디어네트워크(SNS)를 통해 퍼뜨리고 있다.

 상인회 관계자는 “벽화를 보러 오는 젊은이가 늘면서 장사도 잘된다. 무엇보다 거리를 지나는 주민들의 표정이 이전보다 밝아진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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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장찬우 기자
사진=프리랜서 진수학, 천안·아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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