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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과 밸런타인 데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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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내일은 밸런타인 데이와 정월 대보름이 서로 겹친 날이다. 두 세시풍속일이 같은 날이 된 것은 밸런타인 데이가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이후로 처음이 아닌가 싶다. 한데 정월 대보름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다. 추측컨대 많은 젊은이들이 내일을 밸런타인 데이로 생각할 거니까. 그렇지 않아도 정월 대보름은 세시풍속의 무대에서 조연으로 전락해가는 처지였는데 밸런타인 데이의 동시 출연으로 인해 존재감이 더 약화되었다. 이런 날에는 현대 사회에서 퇴색해가는 전통적 세시풍속일의 운명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세시풍속은 해가 바뀌어 그날이 돌아왔을 때 반복되는 생활양식을 일컫는다. 쉽게 말하면 설날에 설빔을 입고 세배를 한다거나, 추석에 송편을 먹고 보름달에 기원을 하는 일들이다. 우리나라의 세시풍속은 대개 농사력과 연관을 맺고 있다. 예컨대 추석은 수확을 끝마치고 햅쌀과 햇과일을 조상들에게 바치며 감사하는 날이다. 농경문화가 피워낸 세시풍속일 중에서도 정월 대보름은 아름다운 꽃이었다. 현대인들은 정월 대보름을 부럼을 깨고, 귀밝이술을 마시는 날로 생각하지만 과거에는 마을에서 제일 큰 행사가 벌어졌던 축제의 날이었다.

 줄다리기, 달집태우기, 차전놀이, 당산제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민속놀이나 마을의 공동체 의례는 대부분 정월 대보름에 치렀다. 이런 관습은 풍농(豊農)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곡밥을 먹는 관습도 농사를 잘 지어 풍성한 식탁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풍농 기원의 행사가 대보름에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태음력을 중시했던 예전에 보름달이 처음으로 뜨는 정월 대보름은 신성한 날이었다. 전통적 관념에서 달은 생산이 가능한 여성과 대지를 상징했으며, 달덩어리가 된 대보름은 특히 생산과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여겼다. 이날에 기원하는 풍농이야말로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법이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달의 문화도 영원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의 성장은 세시풍속의 재편을 예고했다. 산업사회로 급격히 변모하는 과정에서 농경에 뿌리를 둔 정월 대보름의 인기는 하락했다. 소비사회가 도래하자 정월 대보름은 더욱 후퇴하였다. 개인의 소비를 촉진시키는 사회에서 공동체의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정월 대보름의 퇴보는 필연적이었다. 이때 등장한 기념일이 밸런타인 데이였다. 밸런타인 데이는 사제 밸런타인을 추모하는 기념일이었다. 그는 로마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사랑에 빠진 연인의 결혼식 주례를 섰다가 처형당하고 말았다. 연인들의 결혼을 죽음으로 성사시킨 밸런타인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랑의 수호자로 추앙되었다.

 밸런타인 데이는 우리나라에 들어오자마자 2월 세시풍속의 주연으로 등장했다. 현대의 밸런타인 데이는 원래 기념일의 뜻과는 사뭇 달라졌다. 달콤한 맛과 감성적 스토리텔링으로 무장한 것이다. 초콜릿과 사탕 등 달콤한 선물에 사랑의 고백을 담아 남성에게 준다는 스토리 설정은 젊은 여성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사랑과 달콤함은 ‘알면서도 속는다’는 점에서 같은 것일까. 감성적 스토리의 뒷막에 제과회사가 자리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젠 기업이 만들어낸 관습도 세시풍속의 하나로 인정하자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기업이 창출한 관습과 상업성이 끼어든 세시풍속을 부정한다면 현대 자본주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논리다.

 이를 백번 인정한다 해도 찜찜한 마음은 가시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문화가 변하는 것은 진리이지만 그 문화를 창출하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얼마든지 사람이 문화에 개입하여 능동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기업이 현대의 세시풍속에 끼어든 것처럼. 정월 대보름의 가치는 오히려 현대사회에서 빛을 낼 수 있다. 정월 대보름이 상징하는 여성성과 생산, 공동체의 풍요와 평안은 오늘날의 사회가 요구하는 미덕이다. 지금 농촌에서도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여 달집을 태우고, 공동체 행사를 벌이는 등 부흥을 꾀하고 있다. 다시 정월 대보름과 밸런타인 데이가 겹치는 해가 온다면 사람들은 그날을 무엇으로 기억할 것인가. 내일은 궁금증이 커지는 날이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