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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에 담긴 마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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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옛 속담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 같기만 하여라』라고 했다. 1년 중에 단 한번 끼니 걱정을 안 해도 좋을 이 만큼 풍성한 때가 이 중추가절이라는 뜻이다.
한해의 농사가 다 끝나 바쁜 일거리도 없고 과실이 푸짐하고 인심도 마냥 후해지고…. 이래서 매일이 추석 때처럼 살기 좋기를 바라는 마음도 생겼으리라.
이런 추석날을 이틀 앞둔 28일 용산 역에서는 또 다른 「스탬피드」(Stampede) 참극이 일어났다.
비슷한 참사는 14년 전에도 서울역에서 있었다. 그때도 구정을 이틀 앞둔 귀성객들이었다.
「스탬피드」란 겁에 질리거나 놀란 짐승 떼가 앞다투어 도망치는 광경을 말한다. 끔찍한 참극이 벌어지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이래서 전쟁 때 잔뜩 겁먹은 병사들이 패주 할 때에도 그것을 한「스탬피드」라고 표현한다. 아비규환의 모습이 겁먹은 짐승 떼나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새는 성난 병사들이 쇄도해 오는 것을 가지고도 「스탬피드」라는 말을 가끔 쓴다. 그 어느 경우에 쓰이든 「스탬피드」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곧 이성·교양·예절 등을 완전히 저버리고 가장 추악한 삶의 본능에 눈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이런 때에는 사람도 이미 짐승과 다름없게 된다.
이번 참사에는 물론 귀성객들을 충분히 소화할 만큼 짜임새 있게 운송계획을 세우지 못한 철도당국에 일차적인 잘못이 있다.
그리고 또 여러 개의 우연이 작용하기도 했다. 만약에 비만 오지 않았어도 「플랫폼」안이 그렇게 붐비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만취한 장정만 없었더라도, 그리고 그를 부축한 다른 친구들 사이에 승강이가 없었고, 그리고 또 실족하지만 않았더라도 참사는 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은 한번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두세 번씩 일어나는 일을 우연으로만 돌릴 수도 없을 것이다.
참사가 일어난 지 3시간 후에 같은 용산역 개찰구 앞에서 또 다시 8명이 부상하는「스탬피드」사고가 일어났다. 그리고 또 17시간 후에 서울 서부역 구내에서도 똑같은 사고로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세 개의 사고에 말려든 사람들은 모두가 따지고 보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은 조금도 공포에 의해 움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카프카」의 말을 빈다면 귀성열차는 살벌한 생존경쟁을 상징한다.
한번 놓치면 그만이다. 그러나 요금이 비싼 특급열차와는 달리 누구나 안심하고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먼저 올라타야 좋은 자리도 얻을 수 있다.
그러자면 남을 밀어 제쳐 나가야 한다. 자비며 염치를 따질 일이 아닌 것이다. 남을 떠다밀어 기차에 올라탄 사람이 「폼」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 그들은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추석에 담긴 옛 마음씨는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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