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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자질향상…학사순경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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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홍 경사, 무슨 조서를 이 따위로 썼나!』
3시간 동안이나 애써 작성한 심문조서를 담당계장이 휴지처럼 내동댕이쳤다.
홍 경사(45·서울 Y경찰서 형사계)는 13년 동안 수없이 당해온 일이라 아무런 저항감도 느끼지 않는 듯 책상 위에 흩어진 조서용지를 주섬주섬 주워들고 다시 책상에 돌아앉는다.

<당초의 약속 실행 못해>
『연이나 피의자는 음주만 취해야 귀가도중 척추에 영아를 등재하고(어린애를 업고) 보행 중이던 피해자의 두부(머리)를 우수권(오른쪽 주먹)으로 강타, 지면에 전도케(땅위에 넘어지게)한 자로…』
다시 조서를 작성하는 홍 경사는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고 무쇠같이 우락부락한 손가락은 후들후들 떨린다. 홍 경사가 다시 작성한 조서도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아보기 힘든 내용.
도둑 잡는데는 귀신같아도 단순한 폭행사건의 조서하나 제대로 작성하지 못하는게 지난날 외근형사들의 전반적인 수준이었다.
이같은 경찰관의 자질을 향상하고 업무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 민주당 정권 당시 3차례에 걸쳐 모집한게 학사경찰관. 지금까지 학사경찰관은 모두 1천 여명을 뽑았다. 그러나 이들도 적재적소 배치가 되지 않고 당초 약속했던 보수와 사회적 대우를 받지 못하는 등 정책빈곤으로 그동안 3분의2가 경찰을 떠나고 지금은 4백 여명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서울D대학 철학과를 나와 61년 학사경찰 모집 때 경찰에 투신한 박 경사(42·서울S경찰서형사계)는 그동안『적성이나 대학에서 배운 전공을 살려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기회는 한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의욕 잃고 대부분 퇴직>
박 경사가 첫 부임했던 자리는 Y경찰서형사 2계 형사반장. 일선 형사들을 감독하는 형사반장직은 대부분 학력은 없어도 오랜 형사경험을 거쳐 경사가 된 형사실무의 박사급 경찰관이어야 한다.
그러나 형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경사계급장을 단 박 경사에게는 직무자체가 처음부터 맞지 않았다. 역시 학사경찰인 김모 경사는『학사경찰관에게 뒷골목순시나 시키고 정문 입초나 세운다』고 불평, 의욕을 잃고 있다가 얼마 못가 변두리 파출소로 전출됐다.
한달에 고작 3만여원을 받으며 파출소의 고된 업무에 지친 김 경사는『어디가면 경찰생활만 못하겠느냐』면서 사표를 내고 말았다.
이들은 직업에 대한 긍지와 보람도 느낄 수 없었다. K대학정치학과를 나와 경찰관이 된 황 경장(39)은 경찰관 생활 3년만에 중앙청 경비대로 배속됐다. 종합청사 입초 근무를 하고 있던 어느날 관용승용차 한대가 황 경장 앞에서 갑자기 정거하는가 했더니 장년의 신사가 내리면서 악수를 청했다. 대학동창생이었다.
그는 N부의 과장으로 온지 1주일째 된다며 동창생을 만나게 된 것을 반가와 했지만 황 경장은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어색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다. 황 경장은 그 뒤부터 근무하기가 싫어졌고 친구 만나는 것이 무서워졌다고 했다.

<13년간 총경 승진 단 1명>
학사경찰관들은 승진 검사 때도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해 진급의 기회마저 얻기 힘들었다. 경찰 공무원 승진 규정에는 동일 계통 10년 근무를 30점, 훈련성적 30점, 근무평점 40점으로 배정, 학력에 대한 혜택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학사 경사 출신 경찰관들 가운데 지난 13년 동안 총경으로 승진된 사람은 경북 봉화경찰서장 김우현 총경 1명뿐. 경정까지 승진된 사람도 고작 4명, 대부분이 경위·경장에 머무르고 있다.
치안국의 L경무관은 경찰의 자질향상을 위해 학사경찰관을 모집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이들에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간부직을 주지 않고 사역을 시키는 것과 같은 경사급에 보직한 당초의 시책이 잘못이었다고 말했다.
경찰간부들은 고도의 충성심과 복종심, 그리고 끈질긴 형사근성을 필요로 하는 순경·경사의 직위가 일반적으로 대학을 나온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아 근무평점 때마다 학사경찰관이 고교 출신 경찰관보다 뒤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도 지적했다.

<4만여 경관 중 대졸 9%>
전국 4만4천2백51명(73년말 현재)의 경찰관중 대학졸업자는 모두 3천9백19명으로 전체의 약8.9%. 이 가운데는 순경 1천3백85명, 경장 5백7명, 경사 6백22명, 경위 8백17명, 경감 2백27명, 경정 1백49명, 총경 1백58명의 순이다.
이들 가운데 대학졸업 후 경찰대학에 입교, 1년간 간부 후보생 과정을 거쳐 경위에 임명된 이른바 간부 후보생 출신은 약2천 여명. 해방직후인 45년부터 모집한 간부후보생은 올해로 29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경찰의 이른바 사관학교인 간부 후보생 출신가운데는 현직경무관 3명을 비롯, 전체 총경 2백83명의 3분의1에 해당하는 90여명이 총경으로 승진돼 명실상부한 경찰관「엘리트」군을 이루고 있다.
한 경찰간부는 경찰관들이 애써 승진을 해도 군인처럼 장래에 대한 보장이 되는 경우도 거의 없어 경찰관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지 않고 사명감도 결여돼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경찰관의 사회적인 지위가 경찰의 자질향상과 발전을 막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관계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김종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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