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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내 자식이 꽃보다 아름다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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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지난 연말. 경영을 연구한다는 무슨 모임 파티에 갔더랬다. 이름표를 하나씩 주더니 가슴에 붙이란다. 이름 정도는 서로 기억하자는 뜻일 게다. 허리 옆구리에 삐뚜름하게 이름표를 달고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한 멋쟁이 여성이 내 이름을 보더니 반갑게 말을 걸었다. “어머나, 신문에 글 쓰시는 분 맞죠? 글 잘 보고 있어요.” 미처 감사하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메일 보내려 했는데. 딸만 있으시죠? 아들 가진 사람 마음도 좀 헤아려 달라는 하소연이에요. 잘됐네. 오늘 다 말해야지.” 아이고, 오늘 임자 제대로 만난 것 같다.

 “추석 명절이던가. 쌩하고 며느리 떠난 자리 쌩하고 딸 온다는 글이었던 것 같은데. 요즘 며느리들 명절날 너무 빨리 쌩하고 가버리는 거 알아요? 아침밥 먹자마자 설거지 끝내기도 전에 제트기같이 가버려요. 친정에서 점심 먹고 지금쯤 돌아갔겠지 싶어 저녁에 아들에게 전화했더니 저녁까지 먹고 간다나요. 무슨 재미가 그리 있는지 전화기 너머 깔깔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열불이 나지 뭐예요.” 아들만 둘이라는 그분. 아직 결혼 안 한 아들도 결혼하면 다 비슷하겠지 싶어 우울하고 쓸쓸하단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며느리가 명절 당일 친정에 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온 친척들이 장손 집에 모여서 제사 지내고 음식 해먹고 며칠씩 흐드러지게 놀다 가곤 하는 명절. 그 뒤치다꺼리? 죄다 며느리들 몫이다. 그럴 때 행여 친정으로 명절 쇠러 간 당찬 며느리가 있다? 아마도 명절 쇠러 온 시집 친척들의 욕을 한 바가지도 넘게 먹었으리라. 그러니 며느리들은 죽도록 일만 하면서도 친정 생각에 눈물만 삼키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새로이 등장한 병이 ‘명절 증후군’이다. 하소연하던 그분도 ‘명절 증후군’에 대해 쓴 글을 보셨나 보다. 명절날 오후에는 며느리들도 친정에 보내자는 글이었으리라.

 그런데 요즘. 자식들 입시준비, 교통 대란, 명절 증후군 등의 이유로 명절이 소규모로 바뀌면서, 질펀한 명절 잔치는 사라져버리고 명절 당일 친정 가는 며느리들도 많아졌다 한다. 시집 친정 차별 없이 명절을 쇠는 건 아주 좋은 일이긴 하지만 시부모 입장에선 형식적인 인사치레만 하고 친정으로 쏜살같이 달려간 아들·며느리가, 야속하긴 하겠다. 옆에 서서 가만히 듣던 여자가 갑자기 말을 거들었다.

 “요즘 여자들, 참 얌통머리 없어요. 결혼할 때 집은 남자가 해오는 거라 해놓고선 막상 혼수예단 얘기 나오면 남녀가 평등한데 그걸 왜 하느냐며 생략하자더니, 결혼하고 나니 한술 더 떠요. 자기는 친구들과 호텔 뷔페식당에서 실컷 수다 떨다 돌아와서는, 직장 갔다 돌아온 남편에게, 남녀가 평등하니 집안일도 같이 해야 한다면서 청소·설거지까지 시켜요. 돈 버는 일은 당연히 남자의 의무라면서도 집안일·육아 얘기 나올 땐 남녀평등을 외친다니깐요.”

 사실 이런 ‘얌통머리’ 없는 여자들 참 많다. 이럴 때는 전통, 저런 때는 남녀평등. 평등은 그럴 때 들먹이는 게 아니다. 이혼한 후, 호주제 때문에 같이 사는 자식을 동거인으로 올리며 가슴 아파하는 여자. 남편의 폭행을 신고해도 부부싸움은 집안일이라며 경찰이 오지 않아 결국 맞아 죽은 여자. 집안일을 노동으로 여겨주지 않아 평생 일하고도 맨손으로 쫓겨난 전업주부. 그러나 이제는 호주제도 폐지되고, 가정폭력 신고 받은 경찰은 반드시 출두해야 하고, 전업주부도 노동으로 인정받게 되는 등,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이렇게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한 남녀평등 주장은,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불이익을 없애자는 것이지 여자이기에 남자보다 더 이익을 보자는 건 아니다.

감수성이 남달리 예민한, 기타 잘 치는 한 남자가 있다. 한 달 전에 아들을 군대 보내고 나더니 지금껏 울며 지낸다. 예민한 남북관계 뉴스에 가슴 철렁하고, 날씨 추워지면 자기 가슴은 면도칼로 도려내는 것만큼 쓰리단다. 혹여 사위가 여자 문제를 만들어 딸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어쩌나, 남편에게만 모든 걸 의지하며 자기 일을 포기하면 어쩌나. 군대 간 아들 춥지는 않을까, 사고는 안 날까, 결혼할 때 아들 집 장만은 어쩌나. 딸 엄마, 아들 엄마. 걱정하는 건 매한가지다.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