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실종 처리된 북한 주민도 상속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3면

남한의 부모가 숨진 시점에 재산상속 대상인 북한 주민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 증명되면 수십 년 뒤라도 상속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첫 판결이 나왔다.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사정을 고려해 북한 주민에게는 국내 민법이 정한 상속권 행사 시한(6개월) 및 상속권 회복청구 기간(10년)을 적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취지다.

 서울남부지법 민사9단독 서영효 판사는 한국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북한으로 끌려가 실종 처리된 이모(1932년생)씨의 딸(45)이 탈북 후 국내에서 ‘아버지가 받을 상속분을 돌려 달라’며 낸 상속회복 청구소송에서 “이씨 아버지가 남긴 충남 연기군의 선산 중 이씨 상속분(5만여㎡ 중 315분의 45)의 소유권을 이전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이씨의 아버지는 61년 숨졌다. 가족들은 이씨의 생사 확인이 안 되자 실종신고를 내 77년 법원으로부터 실종선고를 받았다. 이씨 몫의 유산은 나머지 가족들에게 분배됐다. 하지만 북한에 생존해 있던 이씨는 브로커를 통해 2004년 중국 옌지(延吉)에서 동생 등과 만났고, 남은 가족들도 그의 생존 사실을 알게 됐다.

 이씨가 2006년 북한에서 숨지자 그의 딸은 이듬해 탈북, 2009년 남한으로 왔다. 이어 2011년 친척들을 상대로 유산소송을 냈다. 서 판사는 판결문에서 “남북 분단이 장기화하면서 북한 주민의 상속권이 침해된 지 10년이 지난 경우가 많다”며 “북한주민은 민법상 권리행사 기간(10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서 판사의 판단은 2012년 제정된 ‘남북 주민 사이의 가족관계와 상속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른 것이다. 이 특례법은 북한에 있는 동생들을 대리한 A씨가 국내에서 친생자 존재 확인소송을 내 승소하자 2009년 정부가 부랴부랴 만든 것이다. 하지만 특례법에 소송 시효를 정하지 않아 논란이 예상됐다.

 당시 A씨 소송을 대리했던 배금자 변호사는 이날 판결에 대해 “ 북한 주민들의 인권 신장에 기여하는 획기적인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법무법인 세종의 이수현 변호사는 “법에 규정이 없는데도 수십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재산을 현시점에서 다시 계산해 돌려줘야 한다면 법적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이 크게 떨어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채승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