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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예비」의 속지주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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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번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있었던 박 대통령 저격사건은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 후에 진행된 사건 배후수사를 둘러싸고 한일 양국사이에 벌어진 의견대립과 일본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는 급기야 우리 국민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릍 불러일으켰다.
더구나 범인 문세광의 배후인물로 뚜렷이 밝혀진 조총련의 김호룡 등 간부들에 대한 일본경부의 소극적인 태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며, 마치 이들 배후인물들이 일본 국내법상 아무런 형사책임도 없는 것처럼 속단하는 발언을 예사로 할 뿐 아니라 아예 이들에 대한 수사권의 발동마저 기피하는 언동을 되풀이하고 있음을 볼 때에 일본측 처사의 부당함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범인 문세광의 진술로 밝혀진 범행과정을 더듬어 보면 첫째 범인 문은 일본국내에서 김호룡 등으로부터 박 대통령의 암살지령을 받고, 둘째 위 범행의 실행을 위한 자금을 받았고, 세째 범행에 사용할 총기를 인수하기 위하여 일본 경찰의 권총을 절취하였고, 넷째 우리 국내에 잠입하는 데 사용할 일본인 명의의 여권을 일본인 여인의 조력으로 위조하였고, 다섯째 저격을 실행한 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위 범행과정 중 마지막 실행행위는 비록 일본의 영토가 아닌 우리 한국 안에서 이루어졌으나 범죄의 모의와 예비 등 실행행위에 필요한 주관적 또는 객관적 준비는 바로 일본국 안에서, 또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저격의 실행행위는 비록 문세광에 의하여 단독으로 감행되었다고 하더라도 범인 문이 암살의 범의를 품고 이의 실행을 의한 준비를 완료하기까지에는 적어도 두 사람의 확정적 인물이 관련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두 사람의 신원은 범인 문의 진술이외에 그들 스스로의 진술에 의하여도 범인 문과의 관련사실을 쉽게 살필 수 있다. 앞서 구분한 범행과정에서 조총련에 속한 김호룡의 행위는 바로 살인의 교사임을 규지할 수 있고 만약 일본측 주장대로 교사를 인정함에 족하지 않다 하더라도 현 시점에서 살인 예비죄의 성립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또 일본여인 「미끼꼬」가 문의 계획을 알고도 위조여권을 발급받는 데 조력했다면 이 여인에게도 살인방조 또는 예비죄의 책임이 있다고 본다.
일본의 현행 형법에는 교사범을 정범에 준하여 처벌하는 규정(형법 제61조)과 방조범(동 제62조)법 및 살인의 예비(형법 제201조)도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따라서 범인 문의 배후인물로 밝혀진 김호룡 등의 행위는 일본 국내에서 이루어졌고 또 일본 형법상의 범죄구성요건에 해당하는 것으로 단정되므로 속지주의(일본 형법 제1조)의 원칙에 입각하여 마땅히 일본의 수사당국이 이들을 입건·수사해야할 것이다.
다만 공범이론상 정범의 실행행위가 속지주의의 적용을 받지 않는 외국에서 이루어졌을 때 그 정범의 교사 또는 방조자에게 형벌을 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 이론이 있으나, 적어도 살인의 예비죄(일본의 형법에는 살인의 음모는 처벌규정이 없음)에 대하여는 살인의 실행행위가 국외에서 이루어진 경우라도 그 예비행위가 일본 국내에서 이루어진 때에는 살인 예비죄가 성립된다는 것이 일본 형법학계의 통설로 되어 있다. 그 이론의 근거는 범죄의 예비행위는 범죄구성사실의 일부분이 아니므로 범죄지 결정의 표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면 김호룡 등의 행위는 정범인 문의 범죄지와 관계없이 일본 형법상의 살인 예비죄(동법 제201조)에 해당함이 명백하며 위 죄의 죄책을 묻는 경우 김호룡의 국적이 어디에 있는가 여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위와 같이 볼 때에 김호룡 등의 행위가 일본의 형법에 저촉되는 범죄를 구성한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되었으므로 이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평가는 완전히 그릇된 것을 직시할 수 있다.
더구나 범인 문의 자백과 문의 가택수사에서 발견된 도난 권총 및 기타 문서와 김호룡 자신이 문과 수차 회합한 사실을 자인하는 발언을 하고 있는 점등을 모아보면 김호룡의 범행 관련 혐의는 객관적 증거에 의하여 뒷받침이 되는 데도 불구하고 일본의 수사당국이 확증이 없다는 구실로 김호룡 등에 대한 입건수사를 전혀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보아도 석연치 않은 일이다.
일본 형사소송법 제189조 2항에는 「사법경찰·직원은 범죄가 있다고 사료하는 때에는 범인 및 증거를 수사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수사개시의 요건은 「범죄가 있다고 사료하는」것으로 충분하며 반드시 범죄의 확증이 있어야 수사를 개시하는 것이 아니다. 또 대개의 경우 수사를 개시하여 관계자의 신문과 증거의 수집 등을 함으로써 범죄의 확증이 드러나게 되며, 수사도 하지 않은 채 일본의 실정법에 해당하지 않는다거나 증거가 없다는 발언을 하는 것은 너무나 성의 없는 태도라고 하겠다.
이번 저격사건이 일본 국내에서 준비되어 인접 우방국인 한국의 국가원수에 대한 암살을 기도했고 이로 인하여 국가원수의 영부인이 불의의 변을 당한 엄청난 결과를 낳은 것을 감안해 볼 때에 우호국가를 자처하는 일본으로서는 국제 예의상 자국의 영역 안에 있는 배후인물에 대한 수사협조에 인색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국민의 반일감정이 새로운 방향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일본 정부의 각성을 촉구한다. <이세중><필자=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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