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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hi] "이승훈 그 친구 감각이 있어요 … 고지 훈련은 묘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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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영하 전 빙속 국가대표. 오른쪽은 1976년 주니어대회 우승 당시 모습. [강정현 기자·대한체육회 제공]

“그 친구 훈련하는 모습을 보니 감각이 있네요. 고지에서 쇼트트랙 훈련하며 심폐기능 강화에 집중한 것도 아주 잘한 겁니다.”

 소치 겨울올림픽 남자 스피드 스케이팅에 출전하는 이승훈(26)을 떠올리면 이영하(58)씨의 얼굴엔 미소가 번진다. 이씨는 한국 빙상의 기틀을 마련한 1세대 스타다.

 1976년 세계 주니어 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이 열린 이탈리아 마도나 디 캄피그리오. 세계 빙상계가 충격에 빠졌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20세의 한국인 청년 이영하가 우승을 차지했다. 그가 꺾었던 에릭 하이든(당시 18세)은 4년 뒤 레이크플래시드 올림픽 500m, 1000m, 1500m, 5000m, 1만m를 석권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고향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 강가에서 나무에 칼을 붙인 스케이트로 빙상을 시작했다. 하이든을 꺾은 날은 기억에 생생하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저를 돌봐주신 양부모님이 경기 전날 최고급 네덜란드제 스케이트화를 구해줬습니다. 전 관심 밖의 선수였는데 제가 생각해도 너무 잘 탔어요. 마지막 5000m에서 3초 이상을 이기면 우승이었는데 죽기 살기로 탔습니다. 제 자신이 가장 놀랐죠.” 이영하는 79년 세계선수권에서는 500m 동메달을 목에 걸며 가능성을 보였다. 하지만 이듬해 레이크플래시드 올림픽 때는 경기 직전 부상을 당해 주 종목이던 500m에서 19위에 그쳤다.

 91년부터 4년간 대표팀 감독을 맡은 이씨는 김윤만을 조련해 대한민국의 겨울올림픽 첫 메달인 92년 알베르빌 올림픽 남자 1000m 은메달을 수확했다. 선수로 못 이룬 꿈을 지도자로 이룬 셈이다.

 2002년 이후 빙상계를 떠난 그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3년 전부터 인제에서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스케이트 교실을 열고 있다. 이씨는 아들뻘인 이승훈에게 “ 5000m는 마지막 네 바퀴가 정말 힘든데 그것만 잘 이겨내면 최고 기록은 가능할 것”이라고 응원했다.

김효경·배중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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