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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언어가 사라지는 순간, 또 하나의 사랑도 사라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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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서울 평창동 ‘임옥상 미술연구소’는 화가 임옥상의 꿈 공장이자 놀이터다. 대구미술관이 기획한 ‘네오 산수화’ 전에 낼 새 작품 앞에 선 그는 “물 흐르듯이 살아왔으니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나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순간, 그 말(言)에서 빠져나온 숨결과 기운들로 이뤄진 영(靈)이다. 하루 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터트린 울음, 죽기 전 내뱉은 어떤 이의 절망,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 사랑, 댐처럼 말로 가득 차 출렁이는 슬픔, 그것이 내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이름을 못 왼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는 설명할 수 있다. 당신이 누구든 내 말은 당신네 말로 들릴 것이다. - 김애란의 ‘침묵의 미래’ 중에서 (필요에 의해 원문을 축약했음)

젊은 소설가 김애란의 이 글을 처음 접한 순간, 내가 쓴 글이 아닌가 착각하였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입 속에서 뱅뱅 돌며 혀만 간질일 뿐 끝내는 내뱉어지지 않던 말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와 이렇게 펼쳐진 것이다.

 지난 10여 년간 나는 세계문자축제를 준비해왔다. 드디어 올 11월 막이 오른다. 나는 그러나 자문자답에도 서툴다. 궁색함을 느낀다. 왜 화가가 미술도 아니고 문자인가. 전시가 아닌 축제인가.

 ‘왜 문자축제를 준비하게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에 나는 “우리 문화를 문자축제를 통해 한 단계 끌어올려 놓고 싶다”라고 말해왔다. 우리 문화는 경제적 수준에 비해 문화적 수준은 현저히 낮고, 문화적 편식이 심할 뿐만 아니라 소비 중심적인 쪽으로 치우쳤으며, 향락과 퇴폐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대중 추수적 상품문화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는 한류의 성공에 상당히 고무돼 있다. 수입만 하던 문화를 이젠 수출하게 됐으니 엄청난 성공을 한 것으로 자화자찬하는 분위기다. 한류를 위해 우리 모두 한곳으로 힘을 집중해야 한다고 난리다. 수출문화상품 개발에 정신들이 없다. 문화산업의 논리다. 마치 인공조림에 성공하였으니 이 나라 숲의 모든 나무를 베어내고 한류 나무로 심어 가꾸자는 식이다.

 그러나 부분적 조림사업이 성공했다고 전국의 숲을 뒤엎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일부 정책이나 정부의 지원이 실효를 거둘 수는 있으나 그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현명한 정부라면 문화에 맡기고 개입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문화는 소통의 가장 발전된 양태다. 힘센 문화가 약한 문화를 누르고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위무하면서 스스로 건강하고 거룩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시대의 문화는 이를 시장논리를 작동시켜 제압하려 한다.

 나는 이 작동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여기에 내 본령인 미술 대신 문자를 끌어들였다. 오늘 이 땅 문자의 현실이 미술보다 더 적나라하고 처절해서이다. 세계엔 현재 3000개의 문자가 있다. 현재 추세대로 간다면 100년 후엔 10여 개의 문자만 남을 것이고 그것도 한 개의 언어를 제외하고는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 될 것이다. 그때 우리의 한글은 과연 살아남아 있을까. 아무도 확언할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오늘의 어문정책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볼 수밖에 없다.

 문화의 중심은 문자다. 만약 문자가 없었다면 세계의 문화가 오늘과 같이 다양할 수가 있었겠는가. 문자야말로 인류문화유산의 꽃이다. 따라서 문자를 지키는 일은 현생 인류의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세계문자는 얼마나 다양한가. 모양·소리·어순·법칙…. 문자를 통하여 이웃과 남을 이해하고 세상의 넓고 깊음을 체험하고 폭넓게 소통할 수 있다.

 “아, 그럼 세계 문자축제를 하자는 것은 국민을 계몽, 계도하자는 것이군요?”

 “네?!” 나는 벌어진 입을 한동안 닫지 못했다. 계몽주의라니…. 나는 문화를 통해 우리의 문화를 품위 있게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인데. 나의 실력으로는 상대를 설득할 수가 없었다.

 내가 문자 쪽을 힐끔거리며 헤맨 것이 바로 이것, 문화의 시원성(始原性)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미술에서는 뿌옇게 잘 보이지 않는, 언어만이 갖는 선명한 선험성이 부러웠던 것이다. 즉, 신화적 결속과 그것이 드리우는 소통의 풍요로운 몸짓에 목말랐던 것이다. 김애란 작가는 내가 하고 싶은 그것을 짚었다.

 사실 나는 미술이 문자보다 더 원초적이고 시원적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에 ‘태초에 일획(一劃)이 있었다’로 맞서왔다. 그런데 김애란의 이 글을 읽으며 ‘문자와 그림이 그 태생과 출발이 다르지 않음을 왜 애써 구분해 왔던가’ 부끄럽기까지 했다. 시·서·화(詩書畵) 동본동원설(同本同源說)을 어찌 잊었으랴.

 김애란의 글에서 보듯 문자는 얼마나 통렬한 방식으로 자신을 찾아 방황하며 외롭게 분투하고 있는가. 태어나 처음으로 터트린 울음, 죽기 전 내뱉은 절망, 자신의 민낯을 스스로 찾고 또 찾는다. 부단히 어머니에게로, 탄생에로 되돌아가려 한다. 절체절명의 죽음까지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때론 꺼져가는 체열로, 때론 침묵으로 부재를 내걸고 시간을 인내한다. 썩어 문드러지는 육신의 마지막 남은 열기까지를 에너지로 쓰려고 안간힘을 쓴다. 마지막으로 김애란은 ‘내 말은 당신이 누구이든 당신네 말로 들릴 것이다’라고 언어 복화술사가 되어 언어의 부활을 꿈꾼다.

 나는 ‘문자 이전의 문자’ ‘문자 이후의 문자’에 축제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자의 비의·시간·공간·침묵, 문자의 냄새·육신, 문자의 숨·피부 등 문자의 탄생 이전과 이후의 문자의 삶과 죽음을 불러내 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거대한 서사가 될 것이다. 문자의 문명사, 문명으로서의 문자.

 21세기 디지털시대, 세계의 문자 지형이 혁명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공동체를 엮는 문자의 순기능은 권력의 도구라는 단순 기능만으로 제한되고 군소 언어들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문자들의 소멸은 그것만으로도 인류문명의 위기다. 과연 100년 후 세계문자는 몇 개나 안녕할까.

 “이 세계를 창조하고 지탱하는 그 살아있는 말이 우리를 들어 올린다. 우리의 심장에서, 그리고 우리의 입에서.”(막스 피카르트 지음 『인간과 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임옥상=1950년 충남 부여 생. 서울대 미대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프랑스 앙굴렘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80년대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에서 활동하며 우리 현실을 반추하는 작품을 발표해 왔다. ‘아프리카 현대사’전, ‘일어서는 땅’전, ‘저항의 정신’전 등 개인전을 다수 열었다. ‘코리아 통일 미술’전,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 ‘새야, 새야 파랑새야’전 등 국내외 그룹전에 참가했다. 환경조형물로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광화문의 역사’, 매향리 상징물 ‘자유의 신 in KOREA’ 등이 있다. 저서로 『누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지 않으랴』『벽 없는 술관』(생각의나무)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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