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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처분의 역설 … AI 안 걸린 농가 더 힘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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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충북 진천군에서 오리를 살처분하려고 몰고 가는 모습. 살처분 농가는 보상을 받지만, 그렇지 않은 농가는 팔 길이 막힌다. [뉴스1]

전북 김제에서 토종닭을 기르던 농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류 인플루엔자(AI)에 걸려 살처분한 것을 비관해서가 아니다. 소비가 줄어드는 바람에 내다 팔 길이 막혀 자금난에 시달린 끝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6일 전북 김제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오전 5시쯤 김제시 금구면 봉모(53)씨 집에서 봉씨가 자신의 방에 쓰러져 있는 것을 매부 김모(67)씨가 발견했다. 옆에는 제초제 병이 놓여 있었다. 유서는 없었다. 매형은 봉씨를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진 뒤였다. 검사 결과 봉씨는 제초제를 마신 것으로 드러났다.

 봉씨는 3만5000마리 토종닭을 길렀으나 AI 때문에 소비가 줄어 1만8000마리밖에 내다팔지 못했다. 남은 닭 사료비로만 하루 300만원 가까이 들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지난 5일에는 술을 마신 뒤 매부에게 전화해 “돈을 빌려달라”고 하소연했다. 발견 30분 전에는 서울의 조카에게 전화해 “할머니(봉씨의 어머니)를 부탁한다”고 했다. 경찰 측은 “농장 운영이 어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 듯하다”고 밝혔다.

 AI에 걸리지 않은 닭·오리 사육 농민들이 신음하고 있다. 팔지 못해 돈은 안 들어오는데 사료값은 하루 수백만원씩 나가서다. 판로가 막힌 이유는 두 가지다. 봉씨는 소비 감소가 문제였다. 한국토종닭협회 문정진(54) 상임부회장은 “비수기에도 보통 50만 마리 토종닭이 소비되는데 요즘은 30만 마리에 그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농장 근처에서 AI가 발생하는 바람에 닭·오리 같은 ‘가금류 이동 제한’에 묶여 출하를 못하는 농민도 상당수다. 전북 정읍에서 토종닭 11만 마리를 키우는 길덕진(58)씨가 그렇다. 길씨는 토종닭 병아리를 사다가 60일 정도 키워 2.2㎏쯤 되면 내다판다. 그러려던 지난달 28일 이동제한 명령이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그냥 계속 키우게 됐다. 길씨는 “사료비가 하루 평균 1000만원씩 28일부터 지금까지 거의 1억원이 들었다”고 전했다.

닭은 지금 2.8㎏까지 자랐다. 덩치 때문에 ‘조폭 닭’이라 불릴 정도의 크기다. 사료 또한 전보다 많이 먹는다. 자라는 공간이 비좁다 보니 이렇게 몸집 커진 닭 사이에 끼어 압사하는 닭이 하루 100마리 가까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며칠 안에 이동제한이 풀린다고 해도 고민이다. 적정 시기를 놓쳐 제 값을 받을 수 없을 게 불을 보듯 뻔해서다.

길씨는 “제때 출하한 경우에 비하면 아마 4분의 1 값도 받지 못할 것”이라며 “차라리 지금 살처분 대상이 돼 보상을 받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살처분하면 정부가 시중 도매가격에 맞춰 보상해준다. 이동제한 농가에 ‘긴급생활안정자금’을 지원하지만 농가당 최대 1400만원으로 길씨에게는 하루 남짓한 사료값밖에 되지 않는 현실이다.

 AI 직전에 닭·오리를 내다판 뒤 이동제한에 걸려 새로 병아리를 들여오지 못해 농장을 텅텅 비워놓은 곳도 있다. 이처럼 출하 또는 병아리 들이기를 못하는 농가가 정읍시 18곳, 부안군 1곳 등 전북에서만 19곳에 이른다.

 한국오리협회 강구형(46) 부장은 “정부의 긴급지원 자금은 농가가 부담하는 사료값에 비해 턱없이 적다”며 “이동제한을 했다면 우선 살처분과 대등한 정도의 보상을 해주고 나중에 오리·닭을 팔아 소득이 생겼을 때 차액을 환수하는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철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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