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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제4장 관동지방의 한적문화|제20화 청견사에 서린 조선통신사의 풍류(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통신사의『강호입성도』발견>
「동해 제1거 찰」이라 하는 청견사(현 쟁강현 청수시 소재)에 많은 서화를 남긴 역대조선통신사의 행차모습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림이 수년 전 한국에서 우연히 발견된 일이 있다. 70년 5월, 국립중앙도서관의 희귀도서정리 중 우연히 발견된 제3차 통신사의『강호입성도』가 바로 그것이다. 그 당시 어떤 일인 화생이 두루 마리에 그려서 남긴 이 그림(길이 9·78㎝·폭 10㎝=사진 참조)에는 다음과 같은 해제가 붙어 있다.
-이 그림은 일본관영원년(인조2년·1624년)덕천막부 3대장군 가광의 장군 직 취임을 알려온 데 대해 우리 조정이 회답사로 정사 정립, 부사 강홍중, 종사관 신계영과 기타 수백 명의 경축사절을 보냈는데 이들이 강호에 도착, 입성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 맨 앞에는 정장한 우리 나라 병정이 기장(선장)을 메고 걷고 있으며, 그 바로 뒤에 말탄 군관이 따르고, 다음에 국서를 봉안한 보 여를 일인들이 메고, 그 뒤를 또 조선악대가 따르고 있다. 다시 그 뒤「다이묘가고」(일본영주들이 타는 교자)에는 호피를 깔고 사모관대한 조선사신이 의젓이 일산을 받치고 앉아 있고, 행렬 맨 끝은 후비 군관들의 호위가 뒤따르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국빈인 한국사절 일행과 이들을 맞는 일본「사무라이」(무사)들의 차림새가 퍽 대조적인 것이 눈에 띈다. 한인사절들의 풍모는 의관이 단정하고 보무 당당한데 비해 일본「사무라이」의 그것은 아랫도리를 걷어올린 채 칼을 차고 맨발로 걷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당시의 풍속도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어 재미있지 아니한가.
어쨌든 5백 명에 가까운 이들 사절단 일행이 이렇듯 위풍당당하게 동해도 1천5백 리 길을 누비면서 강호에 입성하는 도중과 귀로 이 곳 청견사에 묵게되는 자초지종은 지금도 흥미진진한 한-일 외교사의 한 단면임에 틀림없다.
전후 12회에 걸친 조선통신사파견 중 1617년의 제2회(경도까지)와 1811년의 제12회(대마도까지)를 제외한 10번의 사절단들은 매번 5백 명 가까운 대오를 거느리고 원로 강호까지 입성, 일본의 집권자 장군과 회담을 가졌던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일본 조 야는 그때마다 이들의 접대에 막대한 시간과 인력 및 재정을 동원, 국내일부에서의 비판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덕천 장군들이 이들을 이를 데 없이 극진하게 대접한 것은 쇄국체제 하의 일본에서 이들의 영접이 그들 자신의 위신을 높이고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데 다시없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막대한 영접 비에 조야 비난도>
일본의 역사학자 중촌영효 박사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조선통신사의 일본방문은 17세기로부터 19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거의 국제교류가 끊기고있던 일목에 있어 선진대륙문화를 받아들이는 유일한 통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조선통신사에 대한(조야의)광범한 관심가운데서도 특히 일본문화인들의 이들 사절단의 내일에 대한 기대는 지대한바가 있었다.
그것은 일본의 장수·종군승려가운데는 이미 수 길의 출병 때부터 조선의 중앙·지방에서 많은 유식자들과 상봉, 그 박식함을 알고 있었으며, 또 그들의 왕궁·사원 등에서 뛰어난 문화재를 견문할 기회를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많은 전적을 입수하여 이를 소중히 가지고 돌아왔던 것이며, 귀국 길에는 학식·기능에 능한 다수의 볼모들을 대동함으로써 한인선비들로부터 비상한 문화적 감화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들로부터 배워 온 인쇄술이 있음으로써 일본에서는 비로소 고전의 출판이 행해지고 조선전적의 복각이 성행, 덕천 정권의 문예흥륭정책에 기여한바 적지 않았던 것이다.』『이래서 조선통신사의 입국이 전해지자 일본전국의 문화인들은 연도의 사신들 숙소에 운집, 향응을 제공함은 물론, 짧은 체재기간 중 앞을 다투듯 동문의 이방인과 교환하기를 희망, 한시를 창 수하고 서화의 휘호를 청탁하는가 하면, 필 담을 통해 중국과 조선의 정정·역사·풍속을 묻고 경·사학의 문답을 교환하는 것이 예사가 되었다….』(중촌영효『일선관계사연구 하권』P343∼4, 참조).

<풍류와 함께 남긴「스캔들」도>
이들 일행이 통과할 때마다 묵었던 이곳 청견사와 강니숙 등에는 그래서 이들 사신일행이 남긴 풍류와 함께 조그만 한「스캔들」도 또한 없지 않았던 모양이다. 제3차 통신사(1636년=정사 임 통·부사 김세렴·영사관 황뇨)가 귀국 후에 펴낸『임참판 병여 일본일기』와 그 수원 김동명의『해벌록』을 보면, 3차 때의 사신들 숙소가 청견사 본전 아닌 강니숙의 화양원으로 변경된 이유가 전회사절단 일행 중 사원건물을 더럽힌 자가 있는 등 외교사절로서의 체신을 안 지켰기 때문이라고 자가비판한 대목도 있다.
청견사가 있는 이곳(정강현청수시)는 옛 준부성(현 정강시)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그 곳은 바로 덕천막부의 초대장군 덕천가강의 사저이기도 했던 곳이다. 그는 1607년 이곳에서 최초의 조선통신사(정사 여우길·부사 경섬·종사관 정호관)일행을 맞아 파격적인 향응과 함께 임란 때의 조선인포로 쇄환을 약속 했는가하면 또 한편으로는 그 무대가 바로 본 연재 제7회에서 소개한 한국출신 성처녀「오다·줄리아」에게 사련을 불태운 장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전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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