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아, 겨울궁전 얼음 심술을 녹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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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Iceberg Skating Palace). 600t의 유리로 꾸며진 건물 외벽은 따사로운 햇빛을 아름답게 반사하고 있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휴양지 소치는 5일(한국시간) 낮 기온이 섭씨 20도까지 올라갔다. 뜨거운 태양과 맞선 빙산(Iceberg)처럼 아이스버그는 다채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다.

 경기장 뒤로는 설상 종목이 열리는 마운틴 클러스터가 보인다. 아이스버그로부터 80㎞ 떨어진 이 산엔 새하얀 눈이 쌓여 있다. 태양과 백설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소치 겨울올림픽 피겨스케이팅과 쇼트트랙 경기가 열린다. ‘피겨 여왕’ 김연아(24)의 은퇴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최대 변수는 아이스버그의 빙질이다. 2012년 6월 완공된 아이스버그는 4~5㎝ 두께의 얼음을 깔았고, 첨단 센서를 통해 빙판의 상태를 조절한다. 피겨스케이팅 경기 때는 빙질을 다소 무르게, 쇼트트랙 경기 때는 딱딱하게 만든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빙질이 아이스버그의 장점이자 변수다.

 김연아의 은퇴 무대는 곧 러시아 피겨요정 율리아 리프니츠카야(16)의 홈 그라운드다. 리프니츠카야는 지난달 18일 유럽선수권대회에서 쇼트·프리 합계 209.72점을 받아 국제빙상연맹(ISU) 여자 피겨 공식대회 사상 네 번째 고득점자가 됐다. 김연아가 2010년 밴쿠버 올림픽(228.56점), 지난해 세계선수권(218.31점), 2009년 그랑프리 1차 대회(210.03점)에서 역대 1~3위 기록을 세웠고, 리프니츠카야가 뒤를 이었다. 총체적인 기량에서는 김연아에게 아직 미치지 못하지만 리프니츠카야는 아사다 마오(24·일본)만큼이나 위협적인 상대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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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아는 소치 올림픽에서 처음 아이스버그 빙상에 선다. 반면 리프니츠카야는 이곳에서 국내 대회를 수차례 치렀다. 정재은 대한빙상연맹 피겨심판이사는 “러시아에서 열리는 올림픽이라고 해서 러시아 선수에게 홈 어드밴티지를 주는 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심판들은 이번에도 김연아의 연기를 가장 기대한다”면서 “그러나 아이스버그 빙질에 익숙하다는 것이 리프니츠카야에게 유리할 것이다. 선수들은 빙질의 작은 차이에도 매우 예민하다”고 설명했다.

 ISU가 규정한 피겨스케이팅장은 규격(가로 56~60m, 세로 26~30m)만 제한할 뿐 빙질에 대한 조항이 없다. 빙질은 선수들이 느끼는 미세한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에 2~3회전을 하는 피겨 선수들에겐 결코 작지 않은 차이다. 김연아는 지난해 12월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열린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 대회에서 빙질이 낯설어 점프에 애를 먹었다. 쇼트트랙 경기를 끝낸 뒤 아이스버그가 어떤 빙질을 유지할지, 또 김연아가 얼마나 잘 적응할지가 관건이다.

 2009년 첫 삽을 뜬 아이스버그는 총 건설비 4390만 달러(약 470억원)가 투입됐다. 인부 1000명이 달려들어 2만t에 가까운 거대한 빙산을 세웠다. 5개 층까지 이어진 관중석은 총 1만2000개. 현재 쇼트트랙 선수들이 훈련만 하고 있어 입장 관중이 없지만 대회가 시작되면 러시아인들의 함성으로 가득 차게 된다. 관중의 열렬한 응원도 리프니츠카야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자국 선수가 뛰어난 연기를 선보이고 관중의 호응까지 좋다면 심판의 ‘주관적 느낌’도 커지게 마련이다. 정 이사는 “그렇다 해도 리프니츠카야가 김연아의 예술점수를 따라잡을 순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소치=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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