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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규원(시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이승훈의 『세 편지』(현대문학)와 권명옥의 『오류동』(심상)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한 극적이고 암호적인 표현을 빈다면 우리가 <이 갈보 같은 년의 도시에 낚이어>(권명옥) 살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 살고 있음을 이야기해야 하는 지와 우리가 편리한 사고만을 즐길 때 시에서 무엇을 놓치게 되는지에 대해 두 시인은 각각 다른 시사를 남기기 때문이다.
이승훈의 시는 몇몇 평자들의 견해처럼 <실험>이라는 미명(?)을 붙여 주거나 또는 <난해>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지나쳐 버릴 그런 유의 것은 아니다. 시의 「톤」이 암울한 세계의 어느 구석에서 들려 오는 신경질적이고 또 카랑카랑하면서도 음습한 목소리의 존재로 우리 앞에 다가서기는 하지만 그러나 보기보다는 극히 단순한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계는 열두 점, 열세 점, 열네 점을 치더라.
시린 벽에 못을 박고 엎드려 나는 이름 부른다. 이름은 가혹하다. 바람에 휘날리는 집이여. 손가락들이 고통을 견디는 집에서, 한밤의 경련 속에서, 금이 가는 애정 속에서 이름 부른다.
이름 부르는 것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밤, 더욱 시린 밤은 참을 수 없는 강가에서 배를 부르며 일어나야 한다….-『이름 부른다』의 일부.
작품 『세 편지』 중의 하나인 『이름 부른다』도 이승훈의 근작시들이 그러하듯 <경련 하는 존재>에 대한 그 나름의 집요한 탐구의 일면이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경련 하는 존재여, 너의 이름을 이제 내가 펄럭이게 한다>라는 끝 귀절이 구체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매우 복잡하고 까다롭게 표현되어 있는 듯 하지만 그 실은 그렇게 복잡한 논리나 또는 의미의 집적체는 아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람에 휘날리는 집, 고통을 견디는 손가락들, 금이 가는 애정 등등은 모두 <경련 하는 존재>의 상황의 일면이며 <이름 부른다>는 표현은 <이름은 가혹하다>라는 표현이 말해주 듯 존재에 대한 그 나름의 확인 행위라는 점이 문맥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아픔>이라는 말 앞에 『어떻게 아프고 어떻게 아프며 어떻게 아프다』라는 반복과 병치, 그리고 형용사구 같은 귀절이 많이 있다고 해서 난해하다는 얘기나 또는 그 표현이 실험적이라는 식의 얘기는 별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보다는 이승훈의 시의 문젯점은 꽤 <경련 하는 존재>인가라는 이유가 그렇게 참혹할이 만큼 절망적이면서도 시속에 표현되어 있지 않으냐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는 그의 병치, 반복되는 구절 속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만 <무엇 때문에> 경련 하는 존재인가를 밝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의 관념, 즉 어려운 이 시대의 삶을 살아가는 한 지식인의 존재라는 관념을 앞세우면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시가 요구하는 것은 시의밖에 어떤 추상적 관념의 도움을 받아 존재하는 하나의 관념으로서의 문맥이 아니라 한편 한편의 시가 각각 존재이유를 갖춘 개체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때문에 관념만 있고 뿌리가 없을 때 우리는 「추상적」 또는 「관념적」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고성과 시대고라는 관념만을 앞세운 대부분의 시인들이 함께 생각해 볼 문제로 보인다.
권명옥의 『오류동』이 우수한 시라는 나의 표현은 이러한 근거에서부터 연유한다.

<첫눈 온 이 아침 바울이 보낸 편지를 읽으며 아, 내가 그를 저바렸음을, 저바렸음을. 내 반생의 하루하루는 간밤 서걱거린 댓잎 같은 푸른 뉘우침에 찔리고 찔려(오류동3)>라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뉘우침>은 자기 자신의 어떤 <저바렸음>에 대한 아픈 체험과 자각의 이야기이다. 시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개별적이면서도 뿌리가 있는 시 한편 한편이 독립해서 생명을 지닐 수 있게 해주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기록이다.
이런 뿌리 있는 사고. 이런 구체적이고 개별화된 체험의 기록이 아닐 때 우리는 추상적인 관념이나 세련된 언어만을 남기는 불행한 결과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아 나는 이 갈보 같은 년의 도시에 낚이어 시를 쓰고 있다. 일찌기 시에 바친, 그 경건함도 없는 터에 말이다>라는 변이 시인이 쓸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극적인 산문의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시의 뿌리 있음에 의해서이다. 만약 그의 시가 잘 세련된 언어로만 존재했다면 아마 앞의 변 또한 참혹한 산문이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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