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6)<제자=김홍일>|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6사장 김일성에 관한 소문들|이명영 집필 (성대 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제6사 (사장 김일성) 부대의 보천보 습격은 제6사가 장백현 일대와 국경 지대의 국내에서 벌인 물자 조달 작전 (강탈 사건) 치고는 제일 규모가 컸던 사건이다. 또 그것은 만주에 있는 중공당의 동북 항일 연군 속에서 활약하던 한인으로서 국내 침공 작전을 벌이기로는 제1군 제1사 (사장 이홍광) 부대의 동흥읍 습격 (1935년2월13일)에 이은 두번째이자 마지막의 큰 사건이었다.
보천보 습격은 동흥 습격과 모든 방식이 흡사했으나 한 두 가지 다른 점은 사람을 납치하는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광복회의 조직이 침투되어 있었으므로 사람을 납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현 부대의 소행으로 추측>
또 하나 다른 점은 지하 조직의 안내와 호응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습격이 쉬웠고 또 효과 (물자 조달)가 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도 요긴하게 쓸 수 있었던 광복회 조직이었으나 이 조직도 보천보 습격에 한몫을 한 것을 유일한 역할로 하고 붕괴되었다.
보천보 습격이 계기가 되어 그 조직이 탄로 났기 때문이다. 이것이 「혜산 사건」이란 것이다. 그리고 이 혜산 사건을 계기로 해서 제6사장 김일성의 정체가 밝혀진다.
제6사 부대가 1937년6월4일 밤 보천보를 습격했을 때 경찰 측에서는 이를 최현 부대의 소행인줄 알았고 국내 신문도 처음엔 최현 부대가 습격한 것으로 보도했다.
그것은 최현 부대가 무산 쪽에 들어왔다가 쫓겨서 갑산군 보천면 포태리 산 속으로 들어가 버린 며칠 후에 보천보 사건이 일어난데서 온 추측이었다. 보천보 사건 다음날 제6사가 살포한 「비라」로써 제6사장 김일성 부대의 소행임이 밝혀져서 다음부터는 신문들도 고쳐 보도했다.
보천보 사건 전부터 대안에 출몰하는 제6사장 김일성을 쫓고 있던 국경 경찰은 그에 관해 몇개의 엇갈린 정보를 입수했다. 첫째는 김일성이 27세 (1937년 현재), 평남 평양 출신으로「모스크바」에서 군사 훈련 학교를 다녔던 사람이란 정보다.

<목격자들 40대 김일성 입증>
그러나 이것은 풍문일 뿐 확증은 없었다. 동흥 사건 때 이홍광 사장이 19세의 여성인줄로 알려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풍문도 제6사 측에서 위장 유포시킨 것임이 나중에 밝혀졌다. 둘째는 그가 40세 가까운 사람이란 것이었다. 이 말은 보천보 습격 때 약탈품을 운반해 주었던 사람들 입에서 새어 나왔다. 이 사람들은 제6사장 김일성을 봤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본 김일성의 나이가 40에 가깝더란 정보는 과히 틀리지 않았다 (그때 김성주는 25세).
세째는 김일성이 일본 육사 출신이라는 정보다. 이 말은 김일성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혜산진수비대장으로 왔던 김인욱 소좌의 입에서 나왔다. 당시 갑산군 동인면장이었던 김상형씨 (84·서울 성북구 거주)는 김인욱 소좌가 『김일성은 나의 일본 육사 선배인데 이 양반이 어쩌다가 공비가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말을 들었던 사람이다.
김인욱은 장백현에서 목재업을 하고 있던 금야라는 일인의 사용인 「쿠리」수십명을 앞장세워 사방으로 제6사장 김일성의 행방을 찾았으나 헛일이었다.
김인욱 소좌는 제6사장 김일성을 자기의 일본 육사 4년 선배로서 3·1운동 직후 도만하여 무장 항일 투쟁에 나섬으로써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졌다가 근 10년 동안 소식이 없던 김광서 인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장에서 다룸). 김인욱은 같은 김일성이란 이름 때문에 그렇게 알고 그후 함흥고보·영생고보 등에서 시국 강연을 할 때도 한만 국경에 출몰하는 제6사장 김일성은 자기와 일본 육사 동창이라는 말을 곧잘 했다. 그러나 제6사장 김일성은 일본 육사 출신이 아님은 물론이다.
갑산 사건의 판결문을 검토해 보면 제6사장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란 것이 적혀 있다. 그 밖의 신원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연구가들은 북한에서 김성주를 김성주라 주장하는 까닭에 이 기록을 보고 보천보를 습격한 제6사장 김일성이 북한의 김성주와 동일인인줄 착각한다. 바로 이것을 노리고 북한에서는 김성주를 김성주로 바꾸어 놓았다 (함북 지방 법원 창고에 있던 이 기록을 북한 당국은 1946년 초에 입수했다). 우연히 글자 한자의 차이기 때문에 속아 넘어 가기에 알맞다.
이 6사 부대와 관련해서는 또 하나의 왜곡이 있다. 혜산진수비대장 김인욱 소좌 얘기다. 김소좌는 일본 육사 27기 (1915년5월 졸업) 윤상필·백홍석·김석원·남우현 등등 23명의 한인들과 동기였던 사람이다.

<김일성 토벌 부대명에 혼선>
장백현 오지 산악 지대로 철수해 갔던 제6사는 함북 무산 방면에 출동했다가 철수해 온 최현 소속의 제4사 부대와 합류, 3백명 가량의 병력으로 6월 하순 장백현 13도구(신갈파 대안)로부터 또다시 국경 지대를 습격코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인욱 소좌의 혜산진수비대는 6월29일에 행동을 개시, 2대로 나누어 신갈파 봉안으로 진출했는데 30일 새벽에 부응동 근처에서 쌍방이 조우, 맹렬한 교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항일 연군 측은 시체 50여구를 남긴 채 후퇴했으며 김 소좌 부대에는 전사 5명, 중상 5명, 경상 7명이란 사장자가 생겼다.
북한에서는 이 제6사 및 제4사의 연합 부대와 김인욱 소좌 부대와의 교전을 김성주와 김석원 소좌 부대와의 교전으로 바꾸어 놓고있다.
즉 함흥 연대 (74연대) 소속 김석원이 김일성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함흥을 떠날 때 그는 장행회까지 받으며 김일성의 목을 베어 오겠다고 했으나 거꾸로 전멸을 당하고 김석원도 부상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김일성이 김성주라는 주장이다. 이 김일성은 제6사장인 것이며 김성주가 아닐 뿐 아니라 김석원은 당시 같은 소좌로서 용산 연대에 속해 있었다. 함흥 연대에 있은 것은 김인욱 소좌였다.

<김인욱을 김석원으로 바꿔>
북한에서는 저들의 항일 투쟁사를 꾸미기 위해 일제 측 자료를 세심히 참고했는데 그렇다면 왜 김인욱을 김석원으로 바꾸어 놓았는가. 당시 제6사 김일성 부대를 공격하러 간 것은 함흥 연대에 있던 김 소좌다라고만 알려졌었다. 신문에도 김 소좌라고 보도되었다. 그래서 우리 민중들은 이 김 소좌를 김석원 소좌인 줄만 알고 있었다. 그만큼 김석원은 알려졌었고 김인욱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연로한 함경도 지방 사람들에게 물으면 보천보 사건이 나자 김일성 부대를 「토벌」하러 간 것은 김석원 인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북한에서는 일제 자료로 김인욱이 토벌에 나갔던 것을 알면서도 민중들이 김석원 인줄 알고 있으니 저들 주장의 신빙성을 민중의 그릇된 인식에 맞추어 높이기 위해 김석원으로 바꾸어 놓음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이은 중장의 시종무관을 지냈던 김인욱 소좌는 중좌까지 진급했다가 민족 감정이 드러날 적이 있다해서 45년4월 전역되어 고향 (평안도)에 있다가 해방되자 소련군에 잡혀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