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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탈출 막으려 ‘벼랑 끝 고금리’ … 내수 위축 악수될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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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호 18면

“선진국은 돈을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다.” 브라질 중앙은행의 알렉산더 톰비니 총재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신흥국 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과 금리 상승으로 선진국이 신흥국의 자금을 무섭게 빨아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이 표현대로라면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또 한번 청소기를 가동했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를 통해 “양적완화 규모를 100억 달러 추가로 줄인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매달 750억 달러이던 양적완화 규모는 650억 달러로 줄어들게 됐다. 외환위기의 불씨가 피어 오르는 신흥국에 또 한번 불을 지른 셈이다.

테이퍼링 충격에 금리 인상 카드 빼든 신흥국들

“Fed는 미국 이익을 위해 존재”
신흥국에 미칠 충격을 알면서도 추가 테이퍼링을 결정한 Fed. “연준은 기본적으로 미국 경제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존 월리엄스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 총재의 말 그대로다. 따지고 보면 2007년 시작된 초저금리 정책이나 2008년 이후 세 차례 단행한 양적완화 결정 모두 철저히 미국의 경기 회복이 목적이었다. 양적완화로 지금껏 4조1000억 달러 가까운 돈이 풀려나가는 동안 “지나친 양적완화로 부작용이 심각할 것”이라는 경고가 끊임없이 나왔다. 이런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헬리콥터로 돈을 풀겠다”던 벤 버냉키 Fed 의장 덕분에 두 자릿수 실업률이 7%대로 내려오는 등 미국은 긴 불황의 터널에서 빠져나오고 있다. 이 기간, 돈의 힘으로 신흥국도 덩달아 승승장구했다. 터키·인도네시아 등 신흥국에 외국인 투자자금이 몰려들었고, 증시와 통화 가치가 훨훨 날았다.

돈을 풀 때 그랬듯 돈줄을 죌 때도 미국의 경기가 Fed의 제1 관심사다. 이번 양적완화 추가 축소는 만장일치로 결정됐다. FOMC 멤버들 모두 “미국 경제가 개선될 전망을 보이는 만큼, 더 이상의 양적완화는 인플레이션 등의 부작용을 낳는다”는 데 동의한 것이다. “신흥국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는 우려는 큰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리처드 피셔 댈러스 연방준비은행 총재 역시 FOMC 발표 직후 “연준의 정책은 무엇이 미국에 좋은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쐐기를 박았다.

신흥국 “불부터 끄자” 금리 인상
다급해진 신흥국들은 재빨리 진화에 나섰다.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심정으로 잇따라 기준금리를 올렸다. 가장 빨리 움직인 건 인도와 터키다. 특히 터키 중앙은행은 FOMC의 공식 발표가 나기도 전인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심야에 임시 통화정책회의를 소집했다. 기준금리인 일주일 환매조건부채권(레포) 금리를 4.5%에서 단번에 10%로 올렸다. 남아프리카공화국도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상했다. 아르헨티나는 금리를 올리진 않았지만 달러 유입책을 내놨다. 개인이 달러를 사들일 수 없던 종전의 규제를 풀고, “1인당 한 달에 2000달러까지 달러를 사들일 수 있다”고 발표했다. 국제 언론은 아르헨티나의 이런 조치를 “자금 이탈을 막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표현했다.

전격적인 금리 인상은 빠져나가는 자금을 잠시나마 붙들어두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터키 리라화는 기습적인 금리 인상이 발표된 직후 3% 이상 급등했다. 일각에선 “아르헨티나가 지른 불을 터키가 끈다”며 금리 인상 효과에 기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약효는 오래 가지 않았다. 지난달 29일 Fed의 테이퍼링 발표 이후 터키 리라화는 급락해 금리 인상 전과 비슷한 달러당 2.25리라 수준으로 돌아왔다. 인도의 루피화, 남아공의 랜드화도 금리 인상 조치가 무색하게 29일 이후 각각 0.6%씩 가치가 떨어졌다.

하지만 일각에선 “그나마 금리 인상을 한 나라가 선방했다”는 평도 나온다. 기준금리를 올리지 않은 헝가리와 폴란드는 29일 발표 이후 통화 가치가 각각 2.6%, 2.7%나 폭락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신흥국은 적극적인 대응책을 마련하라”며 터키와 남아공을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IMF는 최근의 신흥국 경제 불안이 ^외부 금융상황 ^성장률 둔화 ^원자재 가격 하락 등에 기인했다며 “펀더멘털과 정책 신뢰를 개선할 수 있는 긴급 정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실상 신흥국의 금리 인상과 긴축 정책을 압박한 셈이다. IMF는 터키와 남아공의 재빠른 기준금리 인상 결정에 대해 “효과적이었다”고 평했다.

고금리의 덫, 신흥국 발목 잡을까
자금 이탈이 가속화되는 한, 신흥국은 당분간 ‘금리 인상’이란 방패를 내릴 수가 없다. 15일 브라질의 기준금리를 10%에서 10.5%로 올린 톰비니 총재는 “다른 나라도 긴축 정책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선진국으로 돈이 빠르게 빠져나가면 신흥국은 통화가치 급락으로 수입·소비자 물가가 올라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인도·인도네시아처럼 석유제품을 수입해 쓰는 나라는 당장 공장 가동이 버거워진다. 금리를 올리고 외환보유액을 풀어 환율 방어에 나서는 ‘고전적 대응책’을 쓸 수밖에 없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IMF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에 강요했던 처방 그대로다. “일단 달러 빠져나가는 것부터 막으라”는 것이다.

문제는 고금리의 부작용이다. 금리가 오르면 돈을 빌려 쓴 기업들에 자금 압박이 시작된다. 덩치에 비해 빚을 많이 지고 있던 부실 기업은 대출금리를 감당하지 못해 부도를 내기 시작한다. 기업이 돈을 못 갚고 쓰러지면 은행도 흔들린다. 건전성을 지키려고 부실 대출 회수에 나선다. 그러면서 기업의 자금 압박이 더 심화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대우 등 대기업을 포함해 2만여 개 회사가 부도를 맞고 은행 10개, 종금사 19개가 문을 닫게 된 것도 이런 고금리 정책의 부작용 때문이었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통화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급격하게 금리를 올릴 경우 내수가 위축되고 경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며 “80년대 중반의 중남미 외환위기, 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모두 달러 유출에서 시작해 금융위기로 번지는 과정에 고금리 처방이 있었다”고 경고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최근 펀더멘털이 양호한 헝가리·폴란드 통화까지 흔들리고 있는 건 금융 불안이 취약국에서 신흥국 전반으로 확산됐던 과거와 유사하다”고 경고했다.

인도 중앙은행 “국제 공조 강화해야”
미국 등 선진국이 신흥국을 고려해 통화 정책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라구람 라잔 인도 중앙은행 총재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Fed의 테이퍼링 정책을 두고 “국제 공조가 붕괴됐다”고 맹비난했다. 그는 FT와의 인터뷰에서 “신흥국은 전 세계가 2008년 금융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협력했지만, 선진국은 지금 ‘우리는 우리 일을 할 테니 당신들은 이에 맞춰라’고 하고 있다”며 “선진국은 공조를 회복시키는 데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일부 신흥국이 최악의 위기에 빠져들더라도 과거처럼 전 세계로 위기가 전염되지는 않을 거란 주장도 나온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불안 양상이 아르헨티나와 터키 등 펀더멘털이 취약한 나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고 ^미국이 갑자기 금리를 올리는 등 본격적인 긴축 정책을 펼 가능성이 없으며 ^신흥국이 유연한 환율 제도와 외환보유액 확충으로 과거만큼 취약한 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들며 “신흥국 전반이 위기에 빠질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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