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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 전향자들 겁없는 질주, 소치 썰매장은 기회의 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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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호 23면

스켈레톤 국가대표 윤성빈이 27일 강원 평창 알펜시아에서 열린 봅슬레이·스켈레톤 국가대표팀 미디어데이 때 출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평창=뉴시스]

한국 썰매 대표팀이 소치 겨울올림픽에서 신나는 질주를 준비하고 있다. 봅슬레이·스켈레톤·루지로 나뉘어진 썰매 종목에서 한국은 겨울올림픽 역대 최다인 16명이 참가한다. 봅슬레이 10명, 루지 4명, 스켈레톤 2명이 올림픽에 출전한다. 불과 4년 전 밴쿠버 겨울올림픽 당시 썰매 종목에 6명이 참가했던 것에 비하면 많이 발전했다.

겨울올림픽 역대 최다 16명 출전하는 한국 썰매 대표팀

 그런데 대표팀에서 썰매를 탄 경력이 5년 이상 된 선수는 봅슬레이 남자대표팀의 파일럿(조종수) 김동현(27·강원도청)이 유일하다. 나머지 15명은 썰매선수가 된 지 2~3년 만에 올림픽까지 출전한다. 대부분 다른 운동선수 경력을 갖고 있다 전향해 올림픽 출전의 꿈을 이뤘다. 썰매 경력만 놓고 보면 ‘초보들의 반란’이다.

 봅슬레이·스켈레톤·루지의 경기 방식은 낯설면서도 위험하다. 봅슬레이는 2명·4명 등 여러 명이 원통형 썰매에 타고, 스켈레톤은 썰매에 엎드려서, 루지는 누워서 탄다. 최고 시속 150㎞를 넘나드는 썰매를 타다 뒤집혀 크게 다치는 사고도 일어난다. 그래도 썰매는 체계적인 훈련이 뒷받침되면 빠른 시간 안에 성공 가능성이 큰 종목으로 꼽힌다. 겨울올림픽 썰매 전 종목에 출전했던 ‘한국 썰매 개척자’ 강광배(41) 국제봅슬레이스켈레톤경기연맹(FIBT) 부회장은 “썰매가 많은 운동선수의 새로운 희망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신미화

외국서도 종목 갈아타 성공 사례
썰매선수들 중에는 육상선수 출신이 가장 많다. 여자 봅슬레이 2인승에 출전하는 김선옥(34·서울연맹)은 1997·99년 전국체전 육상 고교·대학부 여자 100m에서 1위에 오른 유망주였다. 98년 아시아육상선수권 국가대표로도 뽑혔던 그는 2008년 은퇴한 뒤 학업에 전념하다 2011년 12월에 봅슬레이로 전향했다. 김선옥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는 신미화(20·삼육대)는 육상 창던지기 선수 출신이고, 남자 봅슬레이 4인승의 오제한(23·한국체대)도 남자 육상 허들 기대주로 주목받았다.

 그 밖에 남자 봅슬레이의 석영진(25·강원도청)은 역도선수 출신이다. 그는 2008년 전국체육대회 역도 고등부 남자 85㎏급에서 인상·용상·합계 3관왕에 오른 선수였다. 루지 대표팀의 조정명(21·대한연맹)은 고등학교 때까지 축구를 했고, 성은령(22·용인대)은 태권도선수를 했다.

 아예 엘리트 체육과 거리가 멀었던 선수도 있다. 스켈레톤 대표 윤성빈(20·한국체대)은 2012년 7월 대표 선발전을 통해 처음 썰매를 타서 19개월 만에 대륙간컵·아메리카컵 등 국제대회 정상에 올랐다. 남자 봅슬레이 대표팀 간판 원윤종(29·경기연맹)도 체육교사를 꿈꾸던 대학생이었다. 그러나 “안정적인 교사직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며 2010년 8월 대표 선발전을 통해 봅슬레이에 입문했다. 그는 미국·캐나다 등 북중미 지역에서 열린 2013~2014 시즌 아메리카컵에서 최고 파일럿으로 선정됐다.

 다른 나라에도 종목을 바꿔 썰매선수로 도전하는 사례들이 있다. 88년 캘거리 겨울올림픽에서 자메이카 육상선수들이 봅슬레이로 전향해 도전한 사례는 영화 ‘쿨러닝’을 통해 이미 세계적인 화젯거리가 됐다. 미국 여자 봅슬레이 대표팀의 롤로 존스(32), 로린 윌리엄스(31)는 육상 단거리 선수로 여름올림픽에 수차례 참가했던 선수들이다. 윌리엄스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100m에서 10초96으로 결승선을 통과해 은메달을 획득했고, 존스는 2012년 런던 올림픽 여자 100m 허들 4위에 올랐다. 존스는 2012년 가을에 봅슬레이로 전향했고, 윌리엄스는 지난해 초 존스의 권유로 입문해 나란히 1년여 만에 겨울올림픽 출전 꿈을 이뤘다.

지도자들, 전국 돌며 수시로 선수 발굴
물론 아무나 썰매선수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기본적인 운동신경은 갖춰야 한다. 가장 주요한 기초 능력은 스피드다. 강 부회장은 “선수를 새롭게 선발할 때 가장 중점적으로 보는 게 순발력이다. 기본적으로 순발력이 좋으면 충분히 다른 기술까지 접목시켜 좋은 선수로 빨리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육상선수들이 썰매로 전향해 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기본 운동 능력이 갖춰지면 체계적인 훈련도 뒷받침돼야 한다. 2010년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에 스타트 훈련장을 지은 뒤 썰매 대표팀은 사계절 내내 훈련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물론 정식 썰매 트랙은 2018 평창 겨울올림픽을 앞두고 2016년께 완공되지만 스타트 훈련장이 만들어지면서 운동장 맨땅에서 달리기만 했던 시절은 지났다. 이 훈련장에서 선수들은 지속적으로 스타트 훈련을 하며 감각을 익혔다. 지난해 10월부터는 체육과학연구원에서 스타트 측정기를 썰매에 붙여 보다 체계적인 훈련이 가능해졌다. 이제 한국 썰매선수들의 스타트 능력은 세계 톱10 수준으로 성장했다. 강 부회장은 “썰매 종목의 90%는 스타트에서 좌우된다. 아무리 다른 걸 잘해도 스타트가 안 되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다. 그래도 평창의 스타트 훈련장은 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전보다 좋아진 환경과 과학적인 분석 등이 더해져 조금씩 좋은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선수들의 피나는 노력도 더해졌다.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썰매에서 버텨 낼 힘을 기르기 위해 체중을 불리려고 하루 8끼를 먹는 건 기본이었다. 원윤종은 “70㎏이었던 몸무게가 지금은 100㎏을 넘는다. 날렵했을 때 찍었던 여권 사진이랑 얼굴이 너무 달라져 출입국심사 때마다 곤욕을 치른다”고 했다. 윤성빈도 “8끼를 먹는 건 정말 고통이었다. 이걸 왜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견뎌 냈다”고 말했다. 정식 트랙이 없어 해외에서 전지훈련을 오랫동안 해야 했고, 개인생활 없이 훈련에만 매진해야 하는 고통도 감내해 냈다.

 썰매 종목 지도자들은 수시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좋은 선수 발굴에 힘을 쏟고 있다. 강 부회장은 “좋은 재능을 갖고 있어도 운동선수 생활이 힘들어 그만두려는 경우들이 많다. 그 선수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는 종목이 썰매”라고 강조하면서 “전국적으로 썰매를 탈 수 있는 인재가 많다. 그들에게 썰매를 권유해 좋은 썰매선수로 키우는 게 나 같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고 말했다. 그 덕분에 썰매 종목에 도전하려는 선수들은 서서히 늘고 있다. 지난해 3월 열린 봅슬레이·스켈레톤 대표 선발전에는 체육고등학교를 다니는 육상선수들을 비롯해 태권도선수도 참가했다. “홀로 단거리 연습도 하고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면서 조용히 준비했다”던 선발전 참가자 이현수(21)씨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 대한봅슬레이스켈레톤경기연맹 관계자는 “평소에도 어떻게 하면 썰매선수가 될 수 있는지 문의하는 전화들이 온다. 연맹에서는 강습회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종목을 소개하고 재능 있는 선수들을 발굴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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