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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제자=김홍일)|민생단 사건 수습과 무관한 김성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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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민생단 사건과 혁명의 기반을 소수민족(한인)으로부터 다수민족(중국인)으로 전환한다는 방침 등으로 중공당 및 군 안에서 한인들의 견디기 어려운 곤욕을 치르고 있을때 이 문제를 들고일어나 올바른 매듭을 짓게 한 사람이 바로 김성주였다고 북한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북한측의 주장으로는 민생단 사건은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파벌주의를 버리지 못한 것과 민족적 「섹트」주의자들 때문에 일어났다고 한다. 민족적 「섹트」주의자란 것은 바로 중국인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북한에서는 중국인들이라고 똑바로 표현 안하고 있다. 민생단 사건은 어디까지나 중국인들의 민족적 편견 때문에 일어난 것인데 북한에서는 그 책임의 일부를 한인 공산주의자들(송일·김성도 등)에게도 있었던 양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그것은 김성주보다 훨씬 앞서서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해왔던 모든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그릇된 사람으로 돌리고 김성주에 의해서만 오로지 참된 한인의 공산주의 운동의 길이 개척되었다는 날조다.

<한인들의 대변자처럼 날조>
어쨌든 이 민생단 사건을 해결 짓기 위한 김성주의 역할은 마치 모든 한인들의 이익 대변자이며 그 옹호자로 활동한 듯이 북한 역사책에 묘사되어 있다. 김성주는 1935년2월말부터 3월초까지 사이에 열린 동포의 중공 당 회의(대황위회의)에서 비상한 설득력과 한인들에 대한 더 없는 애정으로 그 회의를 「리드」하여 민생단 사건 해결의 길을 쟁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터무니없는 거짓이다. 대황위회의는 1935년2월24일부터 3월3일까지 연길현 남합마당대황위 왕청현위 제 3구 농민위원회 사무소에서 열렸던 것만은 사실이다. 「중공동 만당단 특위 연석대회」란 이름의 회의였다. 동만특위책 위극민(30·중국인) 사회로 열린 이 회의의 참석자는 다음과 같다.
중국인측 전기 위외 왕덕태(28·특위위원 동북 인민 혁명 제 21군장), 왕노두(40·특위위원), 종모(24·안도현 독립단 부공작부), 주모(20·상동), 장창수(22·공청혼만 특위조직책),이모(20·동만 특위 선전책), 구모(18·공청혼춘현위), 왕치준(24산·동북 인민혁명 군 제2군사 제1단제 4연 정치위원), 왕대뇌대(29·동만 특위 위원 겸 혁명군 제2사 제2단 정치위원, 조모(29·동만 특위 비서기처장), 이모(30·성위 교통원), 모(30가량·특위위원) 등 13명.

<중한양측서 13명씩 참석>
한인측 송일(32·왕청조위), 수산(30·특위위원), 신종덕(28·연길 제 1단 제 1연 정치위원), 장만임(24·공청특위 선전부·이 회의의 통역을 맡았다), 최봉문(24·공청특위 위원), 강창연(24·공청서 특위책), 춘희(20·공청왕청 현위 선전책), 김일(22·공청 혼춘현위 위원), 최영부(23·공청연길 현위 조직책), 김동규(24· 공청혼춘 현위책), 김희문(24·공청혼춘 현위위패), 모(26·연길노구책), 수남(25·삼도만구실)등 13명.
중·한 양쪽 13명씩 참석한 이 회의 참석자중 김성주란 이름이나 김성주일 듯한 사람의 이름은 없다. 1968년 이전의 북한측 주장에 따르면 김성주는 만주에서 중공 당에 입당해 있었다고 하니 민생단 사건에 관련해서 무슨 움직임이 있었을 법도 한데 이 참석자 명단으로 보건댄 1935년초까지는 존재가 없었던 것이 틀림없고, 또 1968년 이후의 북한주장에 따른다면 김성주는 중공 당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되어있으니 그렇다면 그가 중공 당 동만당단 특위 연석 회의에 참석했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어느 쪽으로 보더라도 김성주가 민생단 사건을 해결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근거 없는 거짓이다. 한편 북한측 주장에 따르면 김성주는 이미 1932년 여름부터 1935년 사이 동만각현에 유격근거지인 해방지구를 창설하고 거기에 「소비에트」 정부를 세우는 것을 지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나중에는 이를 인민혁명정부로 개편하는 것을 지도했다고 한다. 또 유격대장으로서도 제일 유명했다 한다. 따라서 그는 당시 동만에서는 한인 공산주의자로서는 제일 존재가 컸던 사람이 된다. 그런데 왜 동만특위로부터 상대를 못 받았는가. 그만한 사람이면 동만 특위의 책임자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사실은 해방지구운운, 「소비에트」 정부운 운하는 것이 다 거짓인 것이다.

<김성주는 참가할 존재 못돼>
실상은 동만 특위 아래에서1932년 가을부터 1933년 여름사이 일만 군경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산간벽촌 지대에「소비에트」 정부라 칭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자치구역이 몇 개 있기는 했었다. 연길현 왕우구(소속군중 1천3백명), 연길현 석인구(소속 군중 3백명), 왕청현 산왕청(소속군중 8백명) 혼춘현 황구(소속군중 3백명) 혼춘현 연통갈자(소속군중 1천8백명)의 5곳의 한인촌락에 거창하게도 「소비에트」 정부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동만 특위 순시원 김금도와 당 간부 김두극 등에 의해 조직된 것이었다. 둘 다 한인이다. 그랬다가 1933년 여름에 만주성위에 의해 「소비에트」 정부는 좌익 편향적 노선이므로 인민혁명정부로 개편토록 하라는 지적을 받고 인민혁명 정부라 했는데 1934,5년의 일만 군경의 공격으로 박살났던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에서는 이동만 특위가 한일, 김성도·김두극에 의해 이루어진 일, 그리고 만주성위가 한일들을 모두 김성주가 한일로 날조해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워낙 보잘것없는 김성주의 경력을 가지고는 소위 유일 혁명 전통을 만들 수 가 없으므로 남의 것을 갖다가 전부 김성주에게 유리하게, 또 미화해서, 또 과장해서 붙여 놓고 있다. 이것은 모택동이 정강산에 유격근거지를 만들었던 일, 그것으로써 중국의 공산혁명의 기초를 다졌던 일을 모방하기 위한 날조다.
김성주는 대황위회의에 참석한 일조차 없었을 뿐 아니라 참석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그런데 감히 김성주가 대황위회의에서 민생단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북한에서 꾸민 것은 만주의 중공 당 안에서의 중·한인사이에서는 민생단사건이 너무도, 큰 문제였고, 따라서 이를 김성주가 해결한 것으로 하지 앓고서는 소위 유일 혁명전통이란 거창한 거짓말을 성립시킬 수 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황위 회의에서 민생단 사건이 해결된 것은 아니였다. 반 민생단 투쟁을 철저히 하되 상하를 막론하고 일률적으로 체포·학살 한 것은 잘못이며 앞으로는 상하를 가려서하되 정부에 관련자가 있으면 총살하고 하부는 될 수 있는 한 자수시켜 재훈련을 실시할 것과 중공 당이 한민족의 입장을 옹호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정도의 것이었다.

<한인 참석자 3명 곧 피살>
이 회의에서 한인으로 중요 역할을 한 것은 송일·수산·강창연 등이었다. 그러나 이 회의가 끝난 후 얼마 안 있다가 송일·강창연은 오히려 민생단 혐의를 받고 총살되었다. 송일은 3월21일께 현 영구에서, 또 강창연은 3월23일에 총살됐다.
민생단사건과 또 혁명의 기초를 다수민족으로 전환한다는 방침이 선 이후 한인으로서 중공 당 및 군 안에서 배겨날 수 있던 사람은 민족감정이 마비되어 완전히 중국인화한 사람이었거나 아니면 숱한 동족을 거꾸로 민생단으로 몰아 살해에 앞장섬으로써 중국인의 신임을 산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 되었다. 김성주도 공산군의 대원이었던 것만은 사실이었으므로 틀림없이 이런 경우에 해당되어 살아 남았을 것이다.
한인들은 당 및 군 안에서 간부자리에 오르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지대장 정도에 오르기 위해서도 엄중한 신원 조사와 심사를 거쳐야만 했다. 1930년 이전부터 중공 당 당원이었던지 아니면 「코민테른」이나 소련의 극동당부에서 보낸 사람이 아니고서는 한인은 간부가 못 되었다. 따라서 김성주는 간부가 될 자격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조선인민 혁명군이란 조작된 부대를 내걸고 그 총 사령 노릇을 했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황위회의에 참석한 김일이 지금 북한에 있는 그 금일인지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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