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국회심판대에 오른 금융부조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당초부터 기대 안한 자료>
금융부정의 진상을 파헤친다던 국회재무위는 자료제출 시비로 귀중한 질의기간 이틀을 허송했다. 핵심 있는 질문을 위해 자료와 정보가 꼭 필요하긴 하지만 질문기간 사흘 중 이틀을 부차적인 시비로 보낸 데는 여야간에 반성 론이 있다.
자료시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하고 심각했다.
이러한 격렬성은 요즘의 야당입장을 반영하는 것. 박영복 사건이 정치문제화하자 신민당은 당내에 금융부정조사 11인위를 구성, 자료수집에 착수했다.
예전 같으면 이런 기구를 만들지 않더라도 상당한 정보와 자료가 의원들에게 흘러들게 마련. 그러나 이번에는 투서나 정보제공이 거의 없었다. 기구자체의 활동도 여의치 못해 국회의 자료요청을 통한 자료수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민당은 재무위 첫날인 7일 아침 자료요청을 취합하기 위한 대책모임을 가졌다. 여기서 결정된 것이 박영복 관련자료 10여건과 금융부조리 전반을 알 수 있는 6건 등 16건의 자료였다
일반적인 6건의 자료에는 오래 전부터 야당의원들이 정부에 요청해 온 ▲1백억원 이상 거액대출, 1억원이상 무담보대출명세 ▲편중대출명세 ▲감독원의 금용 기관 비위·시정조치 검사서 등이 들어있었다.
이러한 자료를 이번이라고 해서 정부가 모두 제출하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여-야당 어느 쪽도 국회법 1백21조에 의한「위원회의결→의장경유」란 공식절차를 고집하지 않았다.

<남 재무 발언 때 여도 이석>
8일 상오 예정보다 1시간 늦게 정부는 자료를 제출했다. 금융일반에 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금록 통상 분마저 부실하기 그지없었다.
신민당 이중재 의원의 의사진행 발언으로 자료시비가 막을 올렸다.
야당의원들의 자료제출촉구 논거는 대충 박영복의 배후를 파헤치고 편중대출 등 금융부조리를 정책적으로 시정하기 위해 진상을 알아야한다는 것.
이 의원은 땅에 떨어진 금융의 공신력을 회복하는 길도 자료를 제출해 오해를 풀고 잘못된 것을 시정해야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남덕우 재무장관은『금융과 기업의 거대비밀에 관한 자료는 과거에도 안 냈고 앞으로도 그리하겠다』는 소신을 밝히면서 국회에서 특정업체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풍토를 개탄했다.
이러한 남 장관의 강경한 소신 론이 피력되는 동안 공화당의 김유탁·문태준, 유정회의 김영도 의원마저 기분이 상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결국 남 장관의 소신은 반시간도 못돼 국회에 대한 모독이라는 야 의원들의 추궁에 몰려 취소됐다.

<의원과 이름 닮아 웃음도>
자료시비를 풀기 위해 여야는 원내총무 단까지 동원했고 신민당재무위원들은 총무와 원내대책위에 해결방안을 자문했다.
9일 아침의 야당대책회의에서는 자료제출 요구를 다시 강력히 제기하되 표결로 야당요구가 폐기된 경우도 일단 퇴장하기로 했다.
그 때문에 하오회의에선 소수당인 야당이 표결을 요구하고 다수당이 이를 회피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야전략이 모두 브레이크에 걸리자 야당도 금록통상 관계자료를 모두 내겠다는 남 장관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자료시비과정에서 굳어진 분위기는 가끔 박영복의 이름이 신민당의 박영록 의원과 혼동돼 불리는 통에 웃음으로 해소되곤 했다.
신형직 위원장은 분위기가 경화될 때는 일부러「박영록 사건」이란 말을 써 분위기를 풀기까지. 너무 자주 이름이 혼용되자 박 의원은『앞으로 재무위에선 박영복 사건이라 부르지 말고 금록통상 사건으로 불러달라』고 농 섞인 요청을 했지만 그후에도「박영록 사건」이란 오용은 계속됐다.

<김보근은 못 잡나 안>
이틀간의 진통 끝에 시작된 대 정부 질문에서 야당의원들은 사건진상과 금융부조리 전반에 초점을 맞춘 반면 여당의원들은 앞으로의 제도개선책을 주로 거론.
이기택 의원(신민)은 국민들이 박을 욕하기 전에 그 수법에 감탄하는 부정부패에 대한 범국민적 불감증을 문제로 제기하면서 이의 원인이 된 국가기강의 문란을 개탄했다.
고재청 의원(신민)은 은행의 예금유치 과당경쟁·수출업체에 대한 지나친 특혜·권력과 금력의 용이한 결탁·기업윤리의 타락 성이 금융부정의 배경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야당의원들은 권력의 결탁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계속 추궁하면서도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진 못했다.
고 의원이『김보근씨가「택시」를 타고 갈현동 쪽으로 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데 잡지를 않는 것 아니냐』는 소문을 지적하는 정도.
금록사건 외에 인천의 삼성제강 불하경위·상은 관리업체인 화일산업 횡령사건에 관련한 은행간부 수회·어느 두 회사의 3백50억원과 1백50억원 거액대출 설·신탁 은의 한신부동산 3백20억원 대출 등이 제기됐다.
특히 은행의 문제점으로 비현실적인 금리체계와 예금유치경쟁이 여야의원들에 의해 이구동성으로 지적됐다.
구범모 의원(유정)은『지금 같은 때 어느 미친 사람이 예금하겠느냐』고 했고 진의종 의원(무소속)은「4개월 동안에 도매물가가 29%나 오른 상황에서 예금을 유치한다는 것은「유토피아」같은 일』이라고 했다. 당초 한 명 질문하고 답변을 듣는 식으로 운영하려던 대정부 질문은 이틀간의 공전을 메우기 위해「세명 질문-답변」과 늦바람 야간회의의 전통(?)을 답습했다. <성병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