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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김상일 <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의 고뇌나 고통에 대해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작가의 본질적인 임무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한다. 사회적 혼란·불안·빈곤 따위. 그 성격이나 표면상의 원인이 어떤 것이라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요, 마치 화란처럼 해결되지 않을, 또 그래서 피하지 못하고 견디어 낼 수밖에 없는 인간의 경험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작가의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먼저 정연희씨의 『소만도 못한 자식』 (한국 문학) 에 언급하려 한다. 주인공은 25년을 감방에서 살아온 사나이. 그는 6·25당시 밤에 감자를 캐러 갔다가 난데없이 장정을 만나 편지를 전하려 했다. 도중에 체포되어 알고 보니 예의 장점은 빨갱이였다는 것이고 편지는 기밀 문서였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형을 받게 되는데 25년만에 밖으로 나온 사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억울하다거나 분하다거나 혹은 누군가를 미워한다거나 일체 말하지 않는다는 바 문제성이 있다.
이 작품엔 또 하나 『마름 집 아들』이 등장한다. 일제 때 조국, 독립, 원수 같은 왜놈들…어쩌구 뇌까렸고 해방이 되니까 「왜놈들과 맞붙여 싸워서 이긴 것」도 아닌데 자유를 즐겨 외친다. 그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그건 도피다. 산다는 것으로부터의 도피. 그러나 한 시대를 산다는 것은 노동·의무·질서·전통·가족 따위 모든 관계에서 떠날 수 없었고 이러한 관계에서 비롯하는 온갖 중력이나 금욕이 주는 고뇌나 고통을 어쩌지 못하고 견디며 사는 일이었고 그것만이 진실이요, 또 주체성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 인물은 무엇보다도 먼저 초인간적 「모델」에 따라 고뇌를 견디며 살아가는 인간의 한 원형을 보여준 셈이 된다.
이동하씨의 『실종』 (한국 문학)은 요컨대 현실은 결코 뜻대로 되지도 않았고 자유나 행복 따위는 환상에 불과 하다는 주제를 학인 해 준 작품이다. 주요 인물의 하나인 「엔지니어」는 모처럼 과자 나부랭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평범한 소시민인데 그러나 기대는 부서지고 말았다. 찬값이라 보탤 요량으로 가난한 한「세일즈맨」 일가에게 세준 것이 그 「세일즈맨」의 실종으로 그 가족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타율적이었다. 자기 즐거움은 방해되었고 상대가 없어졌으니 애증을 완성시킬 수가 없었다.
현대 생활의 한 단면을 성실하게 펴 보인 작품이다.
송병수씨의 『산골 이야기』 (한국 문학) 는 앞의 작품과 대조적이다. 배경은 사방 둘레가 첩첩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 인간들은 거기서 무엇을 하는가. 생명의 완전 연소를 위해서 살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은 도박으로 지새운다. 마침내 계집까지를 판돈으로 건다. 이 작품엔 하나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었으니 자아를 완전히 불태우고 동시에 자아를 십분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봉제씨의 『분신의 공포』 (시문학) 는 시인이 쓴 최초의 단편이 되지만 문장과 특이한 기법을 주목해도 좋을 것이다. 선량하고 조금씩은 자아가 분열된 일당들은 은행 강도를 계획한다. 그러나 선량한 그들에게 실천할 의지가 없다. 때 마침 신문에 은행 강도가 발생했다는 기사를 대하게 되자 그 범행을 마치 자기가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망상에 빠진다. 고독과 무료를 견디어 내지 못한 지성들의 원망을 다룬 가작의 하나가 될 줄 안다.
이문희씨의 『누행』 (월간 중앙)은 가난한 젊은 남녀의 세련된 인간 관계를 담담한 정감 묘사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스타일」은 이 작가 특유의 것이지만 이 작품의 경우 전체적으로 침중한 분위기에 비해 등장 인물들의 반응이나 행동은 발랄한 부조화 속의 조화가 얼른 눈에 띈다.
끝으로 정이연씨의 『유전』 (현대 문학). 현대인은 숙명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인간 조건을 재확인 해 보인 작품이다. 남편을 장지에 보내면서 영혼 불멸을 믿어 보려는 것이나 회사 간부와 교직자들 사이의 불협화… 이것 모두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조건 설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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