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030) 제36화 양악백년 (5) 김영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우에노」에 들어가던 그핸가 나에게는 또 큰 기쁨이 찾아왔다. 내가 음악공부를 하고있는 것을 누구보다 이해해서 할아버지 몰래 성원을 아끼지 않던 어머니가 대지주인 외삼촌에게 부탁해서「피아노」살돈 5백원을 부쳐주신 것이었다.
당시 「우에노」에는 한국학생은 나뿐이고 일본학생은 거의가 자기「피아노」를 가지고있어 여간 부러운게 아니었다. 나는 바로 「야마하」라는 「피아노」한대를 사서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피아노」연습에 열중하곤 했다.
그런데 이 「피아노」를 산 덕분에 하숙집에서 좇겨나기도 여러번 해야했다. 밤늦도록 쿵쾅거리는 소리를 좋아할 사람은 없어 새로 하숙을 정했다가도「피아노」만 보면 도로 쫓겨나 어떨때는 하루에도 두번씩 이삿짐을 들고 다니기도 했었다.
「우에노」시절의 독일선생들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많다. 「숄츠」라는 「피아노」선생은 공부시간에 학생들이 잘못하면 때리지는 못하고 자기가 치던「피아노」의 건반을 발로 북북 그으며 신경질을 풀어 여학생들을 울리곤 했다.
그래도 「숄츠」선생이 독일로 떠날때는 전교생이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또 성악을 담당한 한 여선생은 학생들의 발성이 제대로 안되면 배에서 소리를 내라면서 벽에대고 두손으로 가슴팎을 콱콱 눌러댔다. 웬 여자가 힘이 그리도 센지 남학생들도 가슴이 콱 막힐 정도였다. 만일 성악선생이 남자라면 다큰 여학생 가슴을 함부로 누를 수 없으니까 반드시 성악선생은 여선생이었고 학교에서도 그렇게 주의를 기울인 모양이었다.
또 「로이터」라는 「피아노」선생은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를 칠 때 『쾅…』하고 건반을 두드리면 언제나 『나인!나인!』하면서 고개를 흔들고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는 작곡자의 심정으로 돌아가 우는 소리틀 내라』고 가르쳤었다.
이렇게해서 남들이 알아주지않는 음악에 온 정열을 쏟아 4년- 나는 드디어「우에노」으악학교를 졸업하게되었다.
1918년 3월 25일 이날을 나는 평생 잊어버릴 수가 없다. 당시 관립학교 졸업식엔 문부대신이 직접 나와 일일이 졸업생들에게 졸업장을 주었는데 청천벽력과도 같이 나에겐 졸업장을 주지않고 수료증만을 주는 것이 아닌가?
압박받는 민족의 설움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 대신이 보는 앞에서 나는 수료증을 북북찢어버리고 이유를 따져 들었다. 대신과 교장은 얼굴 색이 파래지더니 외국인에게는 졸업장을 주지 않기로 되어있다는 변명만 늘어놓았다.
나는 외국인이 「우에노」에 들어오려면 검정고시를 쳐야한다고 해서 학과와 체조까지 치고 당당히 합격했는데 이게 부슨 소리냐, 졸업장을 못주겠으면 4년간 내가 학교에 다니며 쓴 비용을 전부 돌려주든지 그렇지 않으면 문부대신을 걸어 소송을 하겠다고 조리있게 항의했다.
지금생각해도 그대 어디에서 그런 배짱과 말주변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집안도 모르게 무진 애를 써가며 오직 음악에만 정열을 쏟았는데 하도 억울해서 아마 최후 발악을 했던 모양이었다.
대신과 교장은 한참 둘이서 의논을 하더니 연구해보겠다면서 우선 날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그 당시 「우에노」교장은 내가 입학할 때의 탕원교장이 아니고 그 다음에온 자목교장이었다. 또 나와 함께 졸업한 중국학생 한 사람은 수료증만 받고도 아무런 항의가 없었다.
결국 내 주장이 받아들여져 외국인에게도 졸업장을 주기로 규정을 고치고 6일후 또 한번 졸업식을 치르게 됐다.
3월31일 넓은 강당에 학생은 나하나 뿐이고 문부대신과 교장이하 1백여 교수가 정식졸업식때처럼 다 참석했고, 대신이 직접 졸업장을 수여하는 것이었다.
너무도 통쾌하고 감격스러워 간신히 참았던 눈물이 식이 끝나자 펑펑 쏟아져 나와 나는 그만 소리내어 흐느끼고 말았다.
교수들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참 장하다-』하고 격려해주었고 대신은 나를 자기집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기까지했다.
「우에노」를 졸업한 나는 독일에 건너가 음악공부를 계속할 생각이었는데 연희전문에서 자꾸만 오라고 했고 또 집에서는 할아버지 건강이 좋지 않으니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보다 앞서「우에노」3학년 여름방학때 고향집에 가서 결혼식을 올렸다. 급한일이 생겼으니 집에 다녀가라는 할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나는 혹시 붙잡히는 것이나 아닌가해서 미리 왕복표를 사가지고 갔다.
할아버지는 죄지은 사람 모양 무릎꿇고 앉은 나를 한참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너 음악이란걸 한다지?』하고 침통하면서도 조금은 인자한 목소리로 물으셨다.
이젠 끝났구나 하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불호령이 떨어질때만 기다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그 완고한 할아버지는 눈물을 뚝뚝 흘리시면서 『내가 잘못이었다.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내 일찍 허락을 했을 건데…』하시는게 아닌가? 할아버지에게 죄를 많이 졌던 나도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이때 할아버지가 시키시는대로 미리 정혼해 놓은 여자와 결혼하고 말았다. 주요한씨 할머니되는 분이 중매를 서주셨는데 신부는 당시 황신덕 윤심덕씨와 평양숭의여학교 동기동창인 조영호양(현재78세)이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