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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섭 박사를 애도함|전상운<성신여사대 교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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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선생님, 이게 웬일입니까.
어떻게 그토록 홀연히 세상을 떠나실 수 있단 말입니까.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에 저는 정말 제대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냉혹한 이 현실을 원망하고 슬퍼할 줄도 모르는 저도 오늘만은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한번 가슴속에서 복받치는 뜨거운 통곡을 삼키면서 이 글을 씁니다.
아무리 인생이 덧없다 한다지만, 어찌 이다지도 허무하게 떠나실 수 있단 말입니까. 30년을 하루처럼 오직 한국사학을 위해서만 정진하시던 애국적인 학자의 참된 인생이 연탄「가스」에 의하여 비극적으로 끝났다는 것을 정말 현실로 받아 들여야만 하겠습니까.
15년 전 한국 과학사의 논문 하나를 들고 돈암 동의 작은 한옥의 한간 방 서재로 선생님을 처음 찾아뵈었을 때 반기시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은 그 때 국사학자로서보다는「조선과학사』를 쓰신 과학사가로서 더 널리 알러져 있었습니다. 그 만큼 1944년과 1946년에 내셨던 그 저서는 우리 나라 과학사 연구의 선구적인 업적을 이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1966년 3월에 제가 쓴『한국 과학기술사』를 보시고 그 머리말에서『내 개인으로는 20수년 전에 내놓은 과학사가 이제 소용없게 되었다』고 겸손해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그 선구적인 저서가 학문으로서의 한국과학사의 체계를 세우시지 않았다면, 아마도 저희들의 노력은 몇 배나 더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늘, 일제 말기의 식민지치하에서 한국사를 공부하는 한국인이「나라사랑」하는 글을 쓰는 길은 과학사 밖에는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나라사랑」하는 정열은 그후의 모든 선생님의 글에서 언제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59년에 쓰신『정 다산의 정치경제사상연구』에서도 그랬고, 1971년에 쓰신『세종대왕』속에도 그 정열은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그 밖의 수많은 사상사의 논문들과 일제시대 아래서의 민족정신사 건립을 위한 연구 속에서도 선생님은 분명히 학자적인 양심에 바탕을 둔 민족적이고도 애국적인 정열을 감추려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선생님은 오늘의 한국에 사는「역사가의 과제」라는 소신으로 생각하고 많은 글들을 쓰시기를 주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선생님은「외로운 역사가」가 되셨는지도 모릅니다.
선생님,
해가 바뀌고 자리가 바뀌어도 그 꾸밈없고 곧은 마음씨와「나라사랑」과 학문하시는 정열적인 모습은 변하시지 않더니, 이제 환갑이 되시면서 더욱 훌륭한 학문적인 결실을 위해서 글을 쓰려고 조금 넓은 집으로 옮겼다고 기뻐하신 지 몇 달이 채 못 되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하시다니, 이게 웬 말입니까.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그 맑고 꾸준한 노력의 생애와 크나큰 학문적 업적을 거울삼아 우리는 이 슬픔을 이기렵니다. 부디 고이 잠 드시옵소서.
1974년 3윌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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