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대통령이 틀어쥐고 풀어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고작 800m 떨어진 강원도 춘천시 남이섬과 경기도 가평군 자라섬은 ‘규제’ 때문에 서로 다른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20일 함박눈에도 호텔·카페 등이 들어선 남이섬(왼쪽)엔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반면 녹지로 묶여 편의시설을 지을 수 없어 방문객이 찾지 않는 자라섬(오른쪽)엔 차량 견인식 주택(caravan) 몇 대만이 놓여 있다. [가평=김상선 기자]

일반 버스 요금에는 부가가치세(10%)가 붙지 않는다. 서민 교통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속버스는 예외다. 1977년 부가세법에 고속버스를 최고급 교통수단으로 분류한 게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강산이 네 번쯤 바뀐 37년간 법은 꿈쩍도 않았다. 2004년부터 업계와 국회에선 거의 매년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러나 아직도 그대로다. 한 고속버스 업체 관계자는 “세법상 예외 확대가 문제라면 모든 교통수단에 일률적인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데 이도 저도 아닌 상태”라며 “규제의 관성이 그만큼 센 것”이라고 말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고속버스 부가세가 없어지면 요금을 4.5% 낮출 수 있다.

 규제는 지역 경제의 흥망도 가른다. 북한강에 있는 자라섬(경기도 가평군)은 수도권 규제에 묶여 매점 하나 만들지 못한다. 이곳에서 불과 800m 떨어진 남이섬은 강원도여서 규제를 받지 않아 하루 최대 3만8000명이 찾아오는 관광 명소로 성장했다.

 규제 개혁이 쳇바퀴를 돌고 있다. 정부마다 개혁을 외쳤지만 김대중(DJ) 정부를 빼곤 규제가 오히려 늘었다. 이명박(MB) 정부는 ‘전봇대 뽑기’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전봇대는 더 많아졌고 부작용까지 생겼다. 익명을 요청한 한 기업인의 증언이다. “MB 때 상당한 기대를 했다. 각 기관이 엄청나게 조사를 했고, 기꺼이 협조했다. 그런데 별로 바뀌지 않았다. 지금은 조사가 나와도 소극적으로 임한다. 업체 이름이 공개되면 담당 관청 눈에 나고, 거래처도 달갑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숫자도 증언한다. 이명박 정부에선 규제가 2040개 늘었다. 박근혜 정부도 갈 길이 멀다. 현 정부 1년간 규제는 되레 114건 늘었다. 규제의 질도 낮다. 지난해 1~8월 발의된 규제 법안 513건에 대한 한국규제학회의 평가 점수는 58.4점이다.

 어떻게 해야 바뀔까. 답은 규제 개혁이 결실을 본 99~2000년에 있다. 김대중 정부 전반기인 이 2년간 규제는 98년보다 32% 줄었다. 이후 규제가 줄어든 해는 한 번도 없었다. 당시 총리실은 규제 30% 감축안을 보고했으나 김 전 대통령이 50%로 올렸다. “부작용이 있으니 단계적으로 해야 한다”는 건의에 그는 “공무원은 권한을 확대하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단계적·일상적 절차로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며 의지를 관철했다. 당시 규제개혁 업무를 총괄했던 정해주(71) 전 국무조정실장은 “결국 DJ가 맞았다”며 “대통령이 장관 평가에 규제개혁 실적을 반영하고, 국무회의마다 질책을 하는데 어떻게 안 할 수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만드는 사람만 있고, 관리하는 사람은 없는 점도 규제 개혁의 블랙홀이다. 최병선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문제가 생기면 책임 추궁을 당하기 때문에 장차관은 규제 만드는 데만 관심이 있다. 규제의 부작용과 폐해를 없애는 것은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치려면 복잡한 이해 관계까지 풀어야 하는데 빛은 안 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도입하는 규제총량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존 규제에 대한 평가부터 제대로 돼야 한다. 규제별로 성적표를 만들어 공개하라는 제안이다. 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은 “의원 10명만 모으면 언제든 법을 발의할 수 있는 의원입법을 통한 규제도 문제”라며 “의원입법도 규제개혁위원회에서 영향평가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김영훈·김현예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