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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개조의 기수 『가다피』의『문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아랍」통합의 기수를 자처하고 있는 중동의 풍운아「가다피」는「이집트」와의 통합노력이 좌절되자 이번에는 서쪽으로 눈을 돌려「튀니지」와의 통합에 일단 성공했다. 「사타트」가「가다피」의「구혼」을 거절했던 이유는 물론 많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가다피」의『문화혁명』이「이집트」에까지 넘칠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이번「리비아」「튀니지」통합도 합의성명이 있은지 불과 이틀도 되지 않아 「부르기바」가 딴전을 피우는듯 외신은 전하고 있는데 그 이유 역시「가다피」의 과격한『문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다피」의 문화혁명이 시작된지 8개월- 다음은「시카고·데일티·뉴스」에 실린 그중간보고를 요약한 것이다. 【편집자주】
「리비아」의 경우 문화혁명은 낡은 의식구조의 타파운동이다. 말하자면 국민들의 의식수준을 높이기 위한 독특한 형태의 국민운동인 것이다.
「가다피」의장이 문화혁명을 선포한 것은 작년 5월15일, 처음에는 많은 서방「업저버」들이 그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종래의 모든 법률이 사실상 폐지되고 관료조직도 파괴되었다. 정부기관은 물론 학교·공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관에서 인민위원회를 결성, 실권을 잡았다.
그리고 반관료·반관리직의「갬페인」을 전개, 심지어는 장관의 사무실까지 일반대중에게 개방되었다.
말하자면 「파리·코뮌」때의 혼란이 정부의 지도하에 재연되는 듯한 인상이었다.
대부분의 「업저버」들은 이와같은 질서의 파괴가 마침내는「가다피」의 권력체제 자체까지 무너뜨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원인이야 어쨌든 문화혁명이 시작된지 8개월이 지난 지금「가다피」권력은 더욱 강화되고 전국에 산재한 1천9백2개의 각종 인민위원회도 훌륭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트리롤리」의 국립극장에서「리비아」대학 사범대학이 문화혁명 집회를 개최했었다.
연사로 등단한 작가「엘·무슬텬라」씨는 약2시간에 걸쳐 문화혁명의 나아갈 길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의 연설내용을 간추리면 『「리비아」의 독톡한 문화형성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과 이를 위해서는 『모든책을「좋은책」과「나쁜책」으로 분류, 학생들에게「좋은책」만 보도록 지도하자』는 것이었다.
모든 사상운동이 그렇지만「리비아」의 문화혁명도 그 전개과정에서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은 것 같다.
「무스릴라」씨의 강연직후에 벌어졌던 질의응답에서도 그와 같은 일면을 볼 수 있었다.
「아하메드·마스」군이『우리가 상징주의와 그밖의 모든 문학·예술사상을 거부하는게 과연「과학적」인가』라고 묻자「무스딜라」씨는『악을 부정하는「사르트르」의 실존주의나 상징주의, 「비틀즈」류의 장발을 거부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과학적」인 조치』라고 대답했다.
「가다피」의장이 문화혁명을 일으킨 목적은 지극히 낙후한「리비아」국민들의 정치적·사회적 의식수준을 계발해서 모든 일을 자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데 있었다.
이것이「무스딜라」씨에 이르러서는「사르트르」의 거부라는 기묘한 방향으로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가다피」의 대중에 대한 신뢰는 결국 승리를 거둔 것 같다.
문화부명의 과정에서 수없이 연출되었던 시행착오가 대중의 자각에 의해 점차 치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민위원회의 결성중에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박해를 받았지만 8개월이 지난 지금에는 이들의 거의 대부분이 복직되어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있다.
말하자면『무슨 일이든 혁명평의회에 맡겨버리면 나 자신이 독재자로 되고 말것』이라고말한 「가다피」경구는 인민위원회의 결성과 권력분산으로 훌륭하게 해결된 셈이다.
「가다피」는 이와같은「정신혁명」의 원동력을 회교의 교리에서 찾고 있다. 금욕적인 생활양식과 철저한 금주의 시행은 우스꽝스러운 독재자의 유희가 아니라 정치도적 신앙의 결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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