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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민출신 전은 청년·우국지사 규합 사회당을 청년학원으로 개방, 독립군 양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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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70,8년도 위원들 속에는 고찬념과 전덕기란 사람이 있다. 이 두분은 다같이 의쟁부와 종군부 위원을 겸하고 있다. 전회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두 분은 박 서양과 마찬가지로 천민 출신이다.박 서양은 백정해방운동의 거장 박성춘의 아들로서 한국 근대 과학과 음악의 시조가 된데 반하여, 고찬맹념 갓바치 출신으로 성기문학의 개척자가 되고, 전덕기는 민중 항일운동의 수령이 되었다.
그러면 고찬념은 어떤 사람인가? 우선 그는 「게일」 (기일) 목사의 어학선생으로서 성경 번역의 통역자로서 유명하다.「게일」은 l888년 「캐나다」대학 학생 YMCA의 파송 으로 한국에 왔다가 한국 YMCA의 초대 회장이 된 사람이다. 그는 1892년에 원산에 가서 3년간 개척 선교를 할 때 고찬념을 만나 서울에 데리고 와서 1904년에는 연동돈회의 초대장로를 삼았다.그는 1908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했다가 쉬 죽었지만, 그가「게일」 목사에게 준 민속문학적 영향은 지극히 크다. 그의「드러매티」한 생애는 결국 「게일」 로 하여금 그의 유명한 실화 소설 『선봉』인긍으로 삼게 했다.
그는 본래 갓 바치,즉 갓 신 만드는 직업을 가진 천인이었지만, 문학적 소질이 비상하고 광대짓도 곧잘 했다. 그는 전도사 일을 하면서드 가끔 갓바치 일을 해서 용돈을 벌어 썼다. 또 살림이 궁색해지면 잠깐 어디 다녀 온다고 하며 나갔다가 며칠동안 갓 바치 일을 하거나 노름판에 뛰어 들어가 돈을 따 가지고 오곤했다. 그의 친구들은 다 유명한 노름꾼들과 갓 바치와 광대들이었다. 그는 자기 친구들을 교회에 끌어 들였다.
그 중에 임공진이란 사람이 있었는데,그도 역시 갓바치며 광대였다. 「게일」목사는 이 사림들을 자기 집으로 데러다가 장구 치고 거문고와 가야금을 타면서 노래를 부르게 했다.한국고유의 음률을 따 가지고 찬송가를 만들어보자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일」 목사는 광대 임공진을 장로로 삼고자 했다.말하자면 갓바치 세력이 모여서 연동파가 된 것이다.
이러한 세력에 대하여 제일 꺼리는 사람이 이원금 이었다.이는 역사가 이능화의 부친인 동시에 유학자이며 고관 출신의 신자이다. 그는 고찬재를 장로로 삼을 때는 없어서 몰랐지만,임 같은 천인신분을 또다시 장로로 삼는 것을 직접 보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교인 수 백명을 데리고 갈라져 나와 묘동교회를 창실하게 됐다. 그러나 이원긍은 고찬맹과 같은 교인으로서 나중에 이는 YMCA교육부위원이 되고 그는 종교부와 의사부 위원이 됐다.
다음 전덕기 (1868∼1914) 는 상동산회의 목사이다. 그는 서울태생으로 일찍이「스크랜터」의사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었다. 그도 역시 술장이 출신의 천인이다.그는 ,바보온달 같은 사람이라고 할까! 힘도 세고 의협심도 강했다. 하나 무식한 술장이며 술장수 일을 하는 천인이어서 멸시 받으며 살았었다.
그는 처음 예수를 믿을 때에는 「스크탠터」의사(동대문에 있는 이화대학 부속병원의 창설자이며, 그의 부인은 이화 대학과 이화 중·고등학교 창설자)의 심부름꾼이 되었다가 전도사가 되었고, 그 후 감리교목사안수를 받았다.목사가 된 후에도 곧장 이 때의 친구들을· 버리지 않고 그들을 도와주었다.
그는 가난한 친구들에게 땔감과 양식을 대어주었다.병자가 나면 집집마다 문병을 가 서약을 달여 주었고, 친구집에 초상이 나면 찾아가 직접 시체에 손을 대고 초상을 치러주었다.
그 시체가 염병이건 폐병이건 가리지 않고 손대어 주었으며,오뉴월 삼복 중에 시체가 썩어 냄새가 코를 찔러도 꺼리지 않고 나막신을 신고 들어가 그 끔쩍한 초상을 치러주었다. 그러다가 그도 역시 폐병에 걸러서 19r4년 47살에 세상을 떠났다.
뿐만 아니라 그는 1904년부터 자기의 교회당을 청년학원으로 공개해서 애국 청소년을 독립꾼으로 길러내었다.본래는「엡윗」회라는 감리교 교회 청년회로 발족했지만,황성 기독 청년회의 본을 뗘서 토론회와 강연회를 열심히 했다. 그리고 『무쇠골격 돌 근육 대한 소년아』의 노래를 군가 대신 부르며 군사훈련을 더 많이 했다. 이 때문에 문제가 되어 거의 폐쇄 상태에 있다가 군사 훈련 등을 그만두고 그 후 이 학원은 안창호 계 준 이상설 이동령 이승훈등이 조직원 비밀단체 인 신민회의 기관학교로서 독립사상만 고취하다가 완전폐쇄 되고 말았다.
육당 최남선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전덕기 목사 사랑방에서·기독교 신앙과 애국심을 배웠다고 하며,해아밀사 사건도 전덕기 목사 사랑방에서 꾸며졌다는 애기였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전덕기 목사는 천민 출신으로서 그 교회에는 많은 하급 신분 출신들이 입교했었다.그리고 그의 음악학원과 사랑방에는 전국의 평민출신의 청년들과 우국지사들이 우글우글 모여 들었다.
거기에는 YMCA처럼 선교사들의 까다로운 간섭도 없고 양반티가 전혀 없는 수수한 사람들만이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에 지방에서 올라온 이승당 김 구 같은 평민 출신의 우국지사들이 아무런 마음의 부담 없이 출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사랑방은 소윈 상동파라는 정치 「그룹」 의 「센터」 가 되었다.
이 정치「그룹」은 1907년 의해 밀사 사건과 1911년의「백오인 사건」때 의적의 방망이에 맞아 약세화하고 그 두목이던 전덕기 목사가 l914년 별세하자 완전 해산되고 말았다.하나 이 사랑방은 한국 독립운동사상 잊지 못할 곳으로 필이 남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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