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의 철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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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살인자, 그리고 그 추격자, 여기에 웃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정의 심리 면에서 보아 명백한 일이다. 여기에는 오직 숨가쁜 긴장만이 감돌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살인자 아닌 다른 절도·상해 등 평범한 죄명의 피의자 등과 이들을 대하는 평범한 검사인 나에게 있어서도 사정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웃음은 인간의 모든 심리를 종합적으로 나타내는 표정이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작용을 거친 의사의 표현이어서 때때로 위선이 많으나, 표정은 인간의 모든 정의를 본능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솔직하다. 따라서 말과 표정이 다를 경우 우리는 통상 표정을 더 믿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웃음은 바로 그러한 표정의 하나의 형태이다.
그리하여 사람의 표정이 가지가지듯이 웃음에는 가지가지의 형태가 있다. 즉흥적 쾌감에서 일어나는 너털웃음이 있는가 하면 반가움에서 나오는 가벼운 미소가 있고 남녀간의 애정인 「윙크」가 있다. 상대방을 얕보는 비웃음이 있는가 하면 쓰라린 체험에서 나오는 쓴웃음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미소는 인간의 일상적 환희 감정을 가볍게 표현하는 점에서 웃음의 전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웃음은 바로 그러한 미소를 뜻하는 것이다.
웃음은, 특히 미소는 인간의 하나의 표정인 이상 언어에 대신하는 혹은 언어와 병행하는 대화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경우에는 언어보다 뜻 있는 대화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웃음은 언어보다 숨김없는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웃음은 대화이기 때문에 언제나 상대방이 있는 사회적인 행위 양식이나 그와 반대의 감정이라고 할 눈물의 경우에는 혼자서 만의 외로운 독백인 것이다.
웃음은 숨김없는 대화 형식이기 때문에 개방된 사회일수록 웃음이 많고 폐쇄된 사회에서는 웃음을 찾아보기 힘들다. 개방사회에서는 솔직한 대화가 이루어지나 폐쇄된 사회에서는 무거운 침묵만이 억누르기 때문이다. 미국에 가면 전혀 안면조차 없는 어여쁜 아가씨가 지나가면서 『하이!』하고 가벼운 미소를 지을 때 이를 그녀의 애정의 「윙크」로 착각해서는 큰 변을 당할 것이다. 「닉슨」의 웃는 사진은 얼마든지 볼 수 있어도 「브레즈네프」의 웃는 사진은 여지껏 별로 본 일이 없다.
세상은 원래 웃고만 살 수 없다. 원죄를 짊어진 인간의 역사는 예나 지금이나 가시밭길이기 때문에 물론 누구나 미소만 짓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웃음이 있다면 쓰디쓴 웃음이 있다고나 할까?…
그러나 미소는 역시 사람의 성격과 직업 등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쾌활하지 못한 나의 성격이나 인생의 그늘 속 범인만을 다루는 나의 직업 사회에서는 웃음이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나의 여건에도 불구하고 가능만 하다면 웃어가면서 이 거친 인생 길을 걸어가고 싶은 것이다. 【고광우(서울지검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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