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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와 국적의 상관성|이영호씨의 「동화의 국적불명론」을 읽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아동문학가 이영호씨가 아동문학「세미나」에서의 주제발표(중앙일보 10월l8일자 게재)를 통해 『이제까지 한국아동문학의 대부분이 국적불명이었다』고 말한 것은 아동문학계의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금년도 소천아동문학상을 수상한 아동문학가 권용철씨는 이씨의 이 같은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을 보내왔다. <편집자주>
이영호씨는 아동문학은 『서민성의 기초 위에 꽃피워져야하며』, 마해송의 『바위나리와 아기별』, 김요섭의 『날아다니는 코끼리』, 박화목의 『한국에 온 한스할아버지』, 필자의 졸작동화 『별성』을 『국적불명이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로 비판받아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왜 「서민성」만이 우리의 전통적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을까? 1920년대 초기에 발아하여 1935년에 종말을 고했던 「카프」파의 「패턴」을 아동문학에 재현해 보자는 것일까?
우리 겨레의 서민들은 전제군주 정치 하에서 빈곤과 무지와 봉건적인 사상에 얽매어 노예 같은 생활을 해왔다.
왜 어느 문학「장르」보다도 풍성한 꿈을 주조로 해야할 아동문학에 그런 서민성만을 극구 강조하는 것일까?
우리의 신화·설화·민화가 서민층에서 비교적 많이 싹트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고차원적인 것으로 승화시킨 이들은 문자를 이해하는 지식층 내지 귀족층이었다.
유형화된 경향의 작품생산을 강요하는 행위만큼 창조와 무한의 자유를 속성으로 하는 예술의 세계에서 저항 받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씨는 서민성내지 전통성을 동화의 한속성인 것처럼 오인하고있는데, 이러한 나라의 빛깔은 작품의 한 「패턴」은 형성할 수 있을지언정 결코 그 속성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전래동화(민화·설화·신화)나 「리얼리티」를 표현의 한 속성으로 하는 소년소설에서는 의식적으로 의도하지 않아도 나라의 빛깔이 저절로 선명하게 표출되나 동경(환상·신비·꿈)을 한 속성으로 하는 창작 동화에서는 반드시 그럴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안데르센」의 『그림 없는 그림책』은 국적불명인 달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고(개중엔 동양적발상의 인도이야기도 있다) 종교철학시에까지 비견되는 「셍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도 나라의 빛깔이라고는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 작품들이 『심각한 문제로 비판받아야 된다』는 말인가? 별과 바다와 돌멩이·꽃·나비·짐승 등은 나라의 빛깔을 띨 수가 없다.
이런 것을 소재로 한 작품은 무조건 서구적인 발상이며, 그래서 『심각한 문제로 비판받아야 된다』는 말인가?
해변에서 별님과 바위나리가 사랑을 속삭이는 마해송의 『바위나리와 아기별』이나, 우리 나라의 어린이 셋이 「애드벌룬」코끼리에 매달려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는 김요섭의 『날아다니는 코끼리』니, 어린이 날 「안데르센」이 우리 나라에 오는 박화목의 『한국에 온 한스할아버지』나, 환상 속에서 가난한 바닷가의 한 소년이 하늘의 별을 따 깊은 바닷 속에 별성을 쌓는 필자의 졸작 동화 『별성』 등 이씨의 과녁이 되었던 이런 류의 작품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하등의 문제도, 비판의 대상도 되지 못한다.
아동문학은 「서민성의 기조」위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전통성의 기조」위에 꽃피워져야 하며(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지만) 창작동화의 가치 판단에 있어서 국적문제는 추호의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권용철(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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